"약한 것들은 굶고, 역병과 포격에 떨고, 강한 것들은 소파에서 맥주를 마시며 TV로 전쟁을 보지. 강한 자들이 조금만 참으면 약한 자들은 훨씬 편해질 텐데…."
작금의 우리 현실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이 대사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쥐다. 진짜 인간의 이야기를 완벽히 하기 위해 인간 외의 시각을 빌린 것이다.
동물의 시선으로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연극 2편 '쥐의 눈물'과 '벌'이 개막한다.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 검증 받은 극작가 정의신, 배삼식의 신작이라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모으는 두 작품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동원함으로써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객관성의 힘을 갖고자 한 연극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져야 하는가- '벌'
벌이 꽃가루를 옮기듯 가로로 줄지어 선 배우들이 릴레이로 서로의 입을 맞추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입맞춤 동작을 마친 배우는 계속해서 얼굴을 떨거나 날갯짓을 하며 벌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26일 연극 '벌'의 연습실에서는 배우들이 벌의 움직임을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연구원, 농부, 간병인 등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막간극에서는 벌로 분한다.
"우리가 갇혀 있을지 모르는 인간 중심주의를 어떻게 떠날 것인가가 내 작업의 주요 테마"라는 작가 배삼식이 이번에는 벌에 주목했다. 연극 '하얀 앵두', 뮤지컬 '도도' 등에서는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그다.
10월 13일부터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벌'은 토종벌 전염병 사건을 소재로 생명의 순환 고리 안에 담긴 생명과 고통, 치유의 의미를 전한다.
이야기는 지난해 가을 전국 토종벌의 95% 이상을 폐사로 몰고 간 낭충봉아부패병에서 착안했다. '토종벌 구제역'으로 불리는 이 전염병은 벌의 애벌레에서 발생해 번데기가 되지 못하고 말라 죽게 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이다. 연극은 낭충봉아부패병으로 토종벌이 모두 사라진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흘 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말기 암 환자인 온가희를 비롯, 통풍 환자 최요산, 벌침 앨러지가 있는 김대안, 향수병을 앓는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구릉 델렉 등 저마다 고통을 가진 인물의 삶에 벼랑 끝에 몰린 벌 무리의 이야기를 우화적인 막간극으로 삽입했다.
배삼식의 전작 '착한 사람, 조양규'와 '하얀 앵두' 등을 함께 무대에 올렸던 연출가 김동현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의 첫 공동제작 작품이다. 조영진 최현숙 강진휘 정선철 박윤정 이봉련 서미영 김슬기 등이 출연한다. 1644-2003
미천해도 삶은 계속돼야 한다 - '쥐의 눈물'
재일동포의 비극적 삶을 그린 '야끼니꾸 드래곤'을 비롯해 사회 소외층의 삶을 주목한'아시안 스위트' '겨울 선인장' 등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재일동포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이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쥐 가족의 이야기를 택했다.
그가 2009년에 쓴 희곡으로 직접 연출까지 맡은 연극 '쥐의 눈물'은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함석버스를 밀고 다니며 병사들을 상대로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쥐 유랑극단 '천축일좌' 가족의 이야기다. 전쟁이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 속에 주인공들이 즐겨 공연하는 '서유기'의 장면을 막간극으로 넣어 정 작가 특유의 과장되지 않은 유머가 묻어난다. 끔찍한 전쟁 상황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자 애쓰는 천축일좌 가족의 모티프는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따 왔다.
그가 쥐 가족을 연극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가장 하등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통해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는 그가 전작에서도 일관되게 지켜 온 주제의식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잡초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음악극이라고 해도 될 만큼 타악기와 피아노 라이브 연주, 노래가 풍성하게 곁들여진다. 극장의 일반 객석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객석을 무대 위로 올려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좁힌 것도 특징이다.
10월 14일부터 23일까지 구로문화재단과 극단 미추의 공동기획 작품으로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최용진 염혜란 안영훈 황태인 등 출연. (02)747-5161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