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난 위기 처한 세계적 기업들, 여성 CEO에 잇단 SOS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여성임원 비율은 평균 15%선이다. 노르웨이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은 아예 법으로 임원자리의 4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 대기업의 여성임원 비율은 4.7%에 불과하다. 예전보다는 높아졌지만 아직도 다른 선진국기업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비중이다.
여성임원이 늘고 여성CEO가 배출되어야 하는 건 단순히 산술적 양성평등을 위해서가 아니다. 치열한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인재등용에 성적 차별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보는 국내 기업들도 하루 빨리 글로벌 500대 기업 수준의 여성임원 비율은 달성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그 실태와 개선방안을 모색한다.
1996년 코카콜라는 미국 시장 점유율 42%를 기록하며 펩시(31%)를 크게 앞지르자 "이제 펩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8년 뒤. 코카콜라의 아성은 무너졌다. 2004년 펩시는 설립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코카콜라의 매출액을 제쳤다. 만년 2등이었던 펩시가 역전 신화를 쓰기까지, 그 중심엔 인도 출신 여성 경영인 인드라 누이가 있었다.
1994년 임원으로 영입된 누이는 펩시의 오랜 사업 포트폴리오부터 뜯어고쳤다. 우선 피자헛 KFC 타코벨 등 외식부문을 과감히 분사ㆍ매각함으로써, 경쟁 외식업체에도 펩시를 납품할 수 있는 판로를 개척했다. 대신 미래엔 건강음료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하고, 트로피카나(주스) 게토레이(이온음료) 등을 잇따라 인수했다. 경영능력을 인정 받은 누이는 2006년 펩시의 CEO로 임명됐고 2007년에는 회장 자리에 올랐다.
국내 기업 만큼은 아니지만 외국기업에서도 여성이 CEO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미국 경제잡지 포춘이 매년 선정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여성이 CEO인 기업은 12~13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성 CEO가 될 만한 인재들을 키우고,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도 개선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드라 누이 같은 스타 여성 CEO도 계속 배출되고 있다.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거나 혹은 인위적으로 양성평등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학력의 능력 있는 여성이 꾸준히 늘어나는데도 편견 때문에 기업 경영진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은 결국 경쟁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기업간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무기기 업체인 제록스는 2009년 어슐라 번스를 CEO로 임명했다.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첫 흑인여성 CEO가 배출된 것이다. 전임 CEO인 앤 멀케이 역시 여성으로, 2001년 CEO에 오른 그는 엄청난 빚더미에 짓눌려있던 제록스를 회생시켜 회장까지 지낸 뒤 명예롭게 퇴진했다. 이로써 제록스는 CEO자리를 여성끼리 대물림하는 진기록까지 보유하게 됐는데, 회사측은 "갑자기 여성CEO가 배출된 것이 아니다. 회사 방침상 오래 전부터 인력운영 과정에서 목표비율까지 정했을 만큼 여성인재를 육성해온 결과"라고 밝혔다.
평소 보수적이었던 기업이 여성 CEO를 임명하는 경우는 위기상황이거나 기업 전체적으로 커다란 변곡점에 있는 시기일 때가 많다. 2000년대 들어 화학업계에 여성 CEO가 임명되고 있는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성장이 정체상태에 이르자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거나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개선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 임무를 여성 CEO들에게 맡긴 것이다.
세계 최대 실리콘제조업체인 다우코닝은 2003년 업계 최초로 스테파니 번스를 CEO 겸 회장으로 선출했고, 번스 회장은 실리콘의 온라인 판매 등에 성공함으로써 실적을 크게 개선시켰다. 2009년 1월에는 듀폰그룹이 엘런 쿨먼을 CEO 겸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금융위기 여파로 직원의 15%를 줄이는 가혹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도, 연구개발(R&D) 비용은 그대로 유지했다.
휴럿팩커드(HP)는 여성 CEO에게 두 번 'SOS'를 쳤다. 1999년 영입된 칼리 피오리나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했지만 컴팩 인수과정에서 대주주들과 마찰을 빚고 실적까지 악화함에 따라 결국 불명예퇴진했다. 이후 지휘봉을 남성에 맡겼지만 경영개선이 이뤄지지 않자 HP는 마침내 지난 22일 '이베이 신화'의 주인공인 맥 휘트먼을 CEO로 전격 선출했다.
미국의 곡물 메이저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는 곡물 등 식품ㆍ사료회사에서 바이오에너지 등 에너지 분야로 사업을 넓히면서 여성 CEO를 영입한 예다. ADM의 패트리샤 워츠는 1984년 글로벌 에너지기업 쉐브론에 합병된 걸프오일의 샐러리맨에서 시작, 2001년 쉐브론의 부회장까지 올랐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항상 CEO를 꿈꿨던 그는 2006년 ADM CEO로 영입돼 꿈을 이뤘다. 2007?분기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리자 처음으로 전세계 임직원과 똑같이 성과를 나누는 등 여성 CEO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여성 임원 할당제로 '유리천장' 깨는 유럽
유럽은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진보적이다. '유리천정'(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제도적 관행적 장벽)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여성 기업임원 할당제'까지 도입할 만큼 기업 내에서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환경은 확실히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 1월 프랑스 의회는 기업 임원의 40%를 여성으로 채우도록 하는 여성할당제를 법안으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프랑스 기업들은 법 발효 이후 기업은 6개월 안에 최소 1명 이상을 임원진에 포함시켜야 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는다. 프랑스는 이 법안으로 기업 내 여성임원비율이 2014년에는 20%, 2017년엔 40%에 도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스페인도 지난 2007년 기업의 임원 40%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2015년부터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리천정'을 깨려는 노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노르웨이다. 지난 2004년 노르웨이 정부는 공기업에 대해 40% 여성 임원 할당제를 도입했다. 만약 3년안에 할당목표를 이행하지 않으면 회사를 해체하는 방안까지 도입됐을 정도다. 그 결과 2010년 노르웨이 공기업에선 종업원 규모에 상관없이 여성 임원 비율 40%를 달성하게 됐다.
노르웨이의 여성 임원 할당제의 성공은 전 유럽 기업과 공공기관에 할당제 도입을 가속화 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뿐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이 40% 여성할당제를 시행했거나 비슷한 법안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유럽연합(EU)도 노르웨이의 성공을 계기로, 전 유럽에 여성 임원 할당제를 확대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비비안 레딩 EU 집행위원은 올 초 "유럽에 상장된 500대 기업에 여성 할당제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 견제·질시 속 여성 CEO엔 가혹한 평가 잣대…'마녀 사냥' 희생양되기도
여성은 CEO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일단 임명되더라도 탄탄대로가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외부뿐 아니라 같은 기업 내에서도 끊임없는 질시와 견제를 받으며 고전하다 불명예 퇴진한 사례도 종종 있다. 실적이 나빠서 퇴진하는 경우야 어쩔 수 없지만 시장과 언론, 보수적인 내부 경영진이 여성 CEO에겐 특별히 가혹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댄 결과인 경우도 많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칼리 피오리나 HP 전 CEO와 캐럴 바츠 야후 전 CEO가 그 같은 경우. 두 사람은 척박한 IT업계에 '핑크 바람'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실적 부진을 이유로 불명예 퇴진했다.
1998년부터 6년 연속 미국 포천이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가' 1위에 오른 기록을 갖고 있는 피오리나는 80년 통신회사 AT&T에 말단 영업사원에서 시작, 98년 AT&T에서 분사한 통신장비회사 루슨트테크놀러지의 CEO로 임명된 입지전적 인물.
하지만 피오리나는 99년 영입된 HP에서는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2001년 컴팩과 합병을 추진하면서 HP의 창업주인 휴렛가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월가에선 갑자기 '불도저식 밀어붙이기', '밑도 끝도 없는 합병의 도박사'라며 마녀사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실적 부진을 이유로 쫓아낸 직후 HP가 내놓은 실적은 양호했고, HP의 컴팩 합병도 사양산업이던 PC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선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올바른 판단에 따른 것으로 현재 IT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캐럴 바츠 야후 전 CEO도 1992년 소프트웨어회사 오토데스크의 CEO로 14년간 역임하면서 주가를 연평균 20%씩 올렸던 신화적 인물. 2009년 업계 최고 대우를 받으며 '야후의 구세주'로 CEO에 취임했지만 몸값과 상응하는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며 냉혹한 평가가 쏟아졌다. 결국 2년도 안 돼 전화 한 통으로 해고 당한 데 이어 업계에선 '마녀였다'는 독설마저 들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야후는 이미 구글에 밀릴 대로 밀려 더 이상 설 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것 부당하다는 게 냉정한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피오리나나 바츠 같은 사례는 보수적인 기업 풍토에서 단순히 여성을 CEO로 임명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홀로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고 떨어질 때까지 흔드는 대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회사가 그를 믿고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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