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푸틴을 지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대선 이후 내각에서 '실질적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푸틴에게 대선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자신은 12월 국가두마(하원) 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내각의 수장인 총리직을 맡겠다는 설명이다. 푸틴 총리도 "여당의 총선 연방 후보 명부 1순위에 메드베데프를 올릴 것을 제안한다"고 말해 역할 맞교대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날 전당대회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직을 제안하고 푸틴 총리가 수락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각본에 따라 진행된 푸틴의 대선 출정식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대선 후보를 둘러싼 오랜 논란을 불식시키려는 듯 역할 분담이 양측의 사전 합의에 의한 결정임을 강조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우리는 이미 동맹 관계를 맺을 당시 이런 상황 전개를 논의했다"고 말했다. 2008년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부터 차기 대통령 자리를 푸틴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 두 사람의 신경전은 만만치 않았다. 2000~2008년 두 번의 대통령을 지낸 푸틴은 3선 연임 제한에 걸려 메드베데프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는 했지만 실세 총리로 군림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란 우려와 달리 외교ㆍ경제 분야에서 푸틴과 차별화 행보를 보이며 연임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특히 3월 대 리비아 제재를 놓고 푸틴과 불협화음을 노출한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될 경우 러시아는 내전에 직면할 것"이라고 푸틴에게 직격탄을 날리는가 하면, 국영기업 민영화를 이유로 푸틴의 최측근인 이고르 세친 부총리를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로스네프 이사회 의장에서 해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중순 두 사람이 볼가강에서 다정하게 낚시하는 장면이 포착되면서 후보 협상이 마무리됐을 것이란 관측을 낳았다.
자리만 바꾼 푸틴-메드베데프 투톱 체제는 연착륙이 확실시된다. 지난달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유권자의 54%가 통합러시아당을 지지한다고 응답했고, 푸틴 자신도 여전히 지지율 60%를 웃도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8년 개헌을 통해 임기 6년의 중임제로 바뀐 점을 감안하면 푸틴은 2014년까지 총 20년 집권도 가능하다. AFP통신은 "푸틴이 28년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 전 공산당 서기장에 이어 러시아 최장수 지도자에 등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푸틴 집권 3기 과제는 경제개혁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도 "정부는 꿀물만 타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쓰디쓴 약도 처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석유, 가스 등 기간산업을 정부 통제 아래 두고 경제회생을 이끌었던 과거 푸틴식 국가자본주의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미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정치적 안정은 유지되겠지만 로스네프, 가즈프롬 등 거대 에너지 회사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로는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푸틴도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추진해 왔던 민영화와 국제금융시스템 기준을 따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 겸 부총리는 차기 권력구도가 확정된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메드베데프 총리 체제 하에서는 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푸틴의 핵심 측근인 쿠드린 장관은 그 동안 국방예산 확대를 주장하는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왔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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