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박수용 지음/김영사 발행·436쪽·1만6,000원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 일대의 산과 숲과 강을 20년 동안 뒤지고 다닌 사나이가 있다. EBS PD를 지냈고 지금은 콘텐츠 제작자로 네이처21 대표를 맡고 있는 박수용(46)이다. 그가 연해주를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10만㎞ 훑고 다닌 것은 시베리아 호랑이를 좇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그 고난에 찬, 고집스럽고 그래서 아직까지 유일무이한 기록은 다큐멘터리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 생포기' '인간과 호랑이, 공존과 멸종의 갈림길' '한국호랑이, 그 흔적을 찾아서' '시베리아호랑이-3대의 죽음' 등으로 영상화했다.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은 2003년 광복절 기념으로 EBS에서 방영했던 박수용의 '시베리아호랑이-3대의 죽음' 내용을 중심으로 시베리아호랑이 3대를 추적ㆍ탐사한 과정을 글로 응축한 논픽션이다.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는 암호랑이와 그의 새끼들인 월백, 설백, 천지백, 그리고 또 그들의 새끼들로 이어지는 3대 호랑이 가족의 삶과 죽음을 좇아간 기록이다. 또 한때 1만마리에 달했지만 지금은 약 350마리밖에 남지 않은 시베리아호랑이처럼, 살 자리를 잃고 흩어지며 1만여명으로 줄어든 대자연 속의 우수리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베리아의>
흔히 현장성이 살아 있는 글을 '발로 썼다'고 한다. 전 세계에 1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를 무려 1,000시간이나 카메라에 담으며 봤던 호랑이의 삶과 습성, 우수리 대자연의 여러 모습을 담은 이 책은 그냥 발로 썼다고 하기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게다가 저자는 우수리의 광활한 대자연을 찬사와 경이로움은 물론 사색과 반성까지 담아, 잘 단련된 근육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옮겼다. 400쪽이 넘는 논픽션을 그대로 한 편의 서사시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모든 자취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다. 바람은 자취를 쓸어버리고 비는 자취를 씻어버리며 눈은 자취를 덮어버린다.…그나마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뼈다. 다른 자취들은 시간의 흐름과 기후의 침식에 따라 곧 사라지지만 뼈는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그 모습을 오래 유지한다. 뼈는 한 생명이 남기는 마지막 자취다. 그래서 뼈의 자취는 뼈들의 세계, 그 너머로 이어진다. 숲 속에서 뼈를 발견하면 오래 전 한 생명이 내쉬었던 숨결이 다가온다. 그 뼈가 살아 생전 지녔을 투쟁과 감성의 흔적을 마음속 깊이 느낀다. 뼈는 숲 속의 역사이며 불후의 고전이다.'
박수용이 블러디 메리의 뜨뜻한 콧김을 느끼고 콧털이 손등을 스칠 정도로 가까워진, 원치 않던 대면의 순간에는 읽는 이도 잠시 숨을 멈춰야 한다. 인간의 총에 희생되고 마는 블러디 메리 주변을 새끼들이 오랫동안 맴돌 때나, 차에 치어 숨진 새끼 주위에 누운 월백의 자취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제대로 된 국내 논픽션을 고대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 한 권으로 그 해묵은 갈증을 당분간 해갈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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