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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우리와 함께했던 그의 영어책

입력
2011.09.2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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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집집마다 책꽂이 외진 곳이나 헌책들 모아둔 창고를 뒤져보면 한 권은 꼭 나올 것이다. 50대 전후로 나이가 들어버린 책 주인은 감회에 젖을지 모른다. 종이 색깔은 누렇게 변했겠지만, 고교 시절 이 책에 쳐놓았던 밑줄이 아직도 선명하고 책장에는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을 보며 30년도 더 전의 세월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될 것이다.

성문종합영어 저자 송성문(宋成文ㆍ본명 宋錫文) 선생이 지난 22일 80세로 별세했다. 송 선생이 성문종합영어를 쓴 것이 1967년이니(원래 책 이름은 '정통종합영어'였다), 그는 45년 간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에게 영어 공부의 기본을 가르쳤던 셈이다.

영어 공부 방식이 많이 변한 지금도 학생들이 꽤 찾는 책이라지만, 성문종합영어는 출간 이후 특히 1980년 대학 본고사가 폐지될 때까지 한국 고교생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던 필독서였다.

'성문종합영어'에 그어진 밑줄들

송 선생의 부고를 듣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블로거들이 이 책에 얽힌 사연을 올린 글들이 보인다. "오늘날 공무원으로 5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준 은인과 같은 책이다. 군 제대 후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고민하던 시절 독하게 마음 먹고 구입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너덜거리도록 공부한 유일무이한 책이다. 땡뀨! 성문종합영어." "고1 때부터 끼고 살았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갖고 있던 책이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헌책방에 터덜터덜 걸어가서 또다시 걸레가 되도록 읽고, 내가 영어라는 것에 대해 단순 암기 과목이라고 생각했을 때 성문 시리즈는 거의 르네상스와도 같았다. 새로운 문명 그 자체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요즘처럼 화려한 영어 참고서들의 만듦새는 물론 MP3나 CD 등 듣기 교재라고는 전무하던 그 시절, 성문종합영어는 우직하지만 알찬 내용으로 학생들을 영어의 세계로 이끌었다. 존 F 케네디의 저 유명한 말,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는 취임 연설문이 실려 있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올더스 헉슬리 등의 주옥 같은 명문이 예제로 제시돼 있었다. 기자가 다닌 고교는 송성문 선생이 교사로 재직했던 곳이라는 인연까지 겹쳐 학생들은 이 책에서 한층 묘한 신화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그 시절에 성문종합영어는 한 해 30만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없었어도 실질적인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까지 1,000만부 이상은 충분히 판매됐을 거라는 말이다.

그런데 송 선생은 그렇게 영어참고서 판 돈으로 우리 고서를 사 모았다. 그는 초조대장경인 대보적경(大寶積經ㆍ국보 246호) 등 국보 4점과 보물 22점 등 자신이 수집해 소장하던 문화재 100여 점을 2003년 3월 용산 이전 개관을 준비 중이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의 컬렉션은 간송 전형필,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찾은 소전 손재형의 그것에 비견될 만했다. 굳이 돈으로 따지자면 수백억원 대에 달하는 유물이었다. 지건길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송 선생이 기증한 문화재들은 국립중앙박물관 1년 예산 60억원으로 겨우 두어 점 구입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귀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서 판 돈으로 고서 수집, 기증

송 선생은 고서 수집을 시작한 계기를 1970년대만 해도 고서나 고문서 등이 재생지로 팔리거나 가정집 도배지, 아이들 제기차기용으로 쓰이는 현실이 안타까워서였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내놓은 뒤에도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기증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소장품을 찍은 사진을 보며 아들에게 "이젠 모두 가위로 잘라버려라.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야말로 요즘 한창 우리사회에서 운위되는 기부문화의 진정한 선구자였다. 고인의 평안한 영면을 빈다.

하종오 편집국 부국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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