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일본 텔레비전 방송을 한번 켜봤다. 한 여성 애니메이션 그림작가를 탐방해 그의 작업과 작품을 소개해 주는 프로가 특집으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라면 아무래도 성인보다는 어린이들 세계와 노는 것이라 여겨 좀 속을 비트는 절절한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즈음의 나에게는 별 재미없겠다 싶어 채널을 돌릴까 했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의 선진인 일본의 그림작가이고, 같은 여성이고, 같이 창작작업을 하는 사람인데 끝까지 봐보자 싶기도 했다. 모르는 장르이지만, 흐름도 알고 타 장르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타 장르의 창작자들, 또 다른 나라의 창작자들은 어떤 인식 아래 그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며 나아가는가 하는 것을 살피고도 싶어 채널을 고정했다. 아무래도 어린이들 세계는 역시 선한 의지를 북돋우는 스토리이기 쉽겠고, 그것이 한계로 작용해 착한 작품의 탄생이기 쉽겠지만, 그럴지라도 이 작가 나름 어떤 과정을 어떤 방법을 가지고 표현해내는가 하는 것을 엿보고도 싶었다.
그 그림작가의 작품 주제는 '결(結)'이었다. 잇다, 매다, 맺다 등의 뜻을 갖는 '결'은 결합하다 합치다 엮다 묶다라는 행위를 연상케 한다. 과연 그랬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수채화 같은 그림들은 맑고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쉽고 정서적인 그림들이었다. 작가가 여성이기도 해서 그런지 그림은 부드럽고 서정적이었다. 나는 화면으로 직접 그 그림들을 봤지만, 여기에 문자로 그림들 설명하려니 난감하긴 하다. '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은 한 소녀의 긴 머리를 세 갈래 내어 어떤 손이 땋아 내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 올 한 올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꽁꽁 땋아져 한 줄기 땋음머리로 탐스러이 뒤태를 보였다. 첫 화면으로 놓인 이 그림이 작품 전체의 주제를 일단 선보인 후, 작가의 작품제작 과정이 이어졌다. 이 작가는 제재로 특이하게 모래를 사용한다. 모래를 커다란 유리판 위에 고르게 펼친 다음 붓과 손가락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아래 위로 선을 한번 그으면서 시작해 몇 번이고 그 선을 굴리면서 반원 모양으로 둥굴린 뱀을 그려낸다.
아래 위로 따로 떨어진 뱀은 붓과 손가락의 수 차례 손질 후 맞물린 원이 되고, 그 원을 계속 안으로 돌려 가면 까만 동그라미가 된다. 그 동그라미는 압축되며 한 알의 진한 알맹이가 된다. 포도알이다. 포도알 하나에 포도알 하나가 와서 붙기 시작하여 포도 한 송이가 된다. 포도 한 송이는 포도 한 송이씩을 양 옆에 붙여 한가지의 모양 좋은 세 송이 포도가 된다. 그 포도는 하얀 속지가 있는 상자에 넣어져 포장이 되고 리본끈으로 예쁘게 묶여 누구에겐가로 가는 선물이 된다. 그러면서 작품은 끝난다.
이 작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흩어짐, 해체, 따로 노는 개인들, 이런 함의를 가진 모래라는 소재를 잡고 거기에서 이음, 맺음, 결속, 어우러짐 같은 것을 이끌어내어 그 속성을 질적으로 변환시켜서 의미로운 새 성질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모래알은 포도알이다, 포도는 달고, 몸을 회복시켜 주는 과실이고, 효용성 있고 친근하고, 향기도 좋아요, 포도나무 그늘 아래서 부서진 너와 나, 포도알 나누어 먹으며, 우리 회복시킵시다, 병든 몸과 자연, 아픈 마음, 찢어진 세상 회복할 수 있어요... 이런 메시지. 작가가 읽은 세상과 인간은 부서져 따가운 모래알. 그러나 달고 향기로운 포도알은 그 모래알 없다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같이 말하는 것. 그러하니 포도상자 선물이 모래인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기다려 봐도 좋겠는지.
이진명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