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였던 1984년 30여년만에 귀국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 세계적인 예술가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그는 "나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명동성당 건너편 애국유치원을 1938년 졸업하고 만나지 못한 그 친구는 방송인으로, 수필가로 활동해온 이경희씨였다. 이씨가 백남준과 재회한 이후 그의 든든한 국내 후원자로 나눴던 우정들, 유치원 시절의 기억 등을 담은 (디자인하우스 발행)를 냈다. 이씨는 2000년 (열화당)를 통해 주로 백남준과의 유치원 시절을 소개한 적이 있지만 이번 책은 다시 만난 이후 그와 있었던 일화들, 백남준의 작품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씨가 1992년 문화공보부가 정한 '춤의 해'를 맞아 백남준의 행위예술과 춤을 접목시킨 국내 공연을 성사시켰지만 결국 "다시는 이런 부탁하지마"라며 백남준에게 싫은 소리 들은 이야기, 백남준 전시관이 들어갈 국내 올림픽공원미술관 건립이 지지부진하자 건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글을 언론에 게재하라는 요구와 함께 그러지 않으면 절교할 것이라는 느닷없는 통보를 받은 일 등에서 인간 백남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어린 시절 풋사랑의 상대였고 그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던 탓에 백남준의 일본인 부인에게 미움 산 이야기도 군데군데 나온다.
언론의 평가나 직접 둘러본 감상 위주로 독일, 스페인, 미국 등에서 열린 백남준의 다양한 전시도 소개하면서 저자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백남준이 전시 리플릿이나 엽서, 메모지 등에 애정 어린 장난으로 표현한 그림이나 타이포그라피다. '사인 아트(sign art)'라고 이름 붙인 이 '작품'들을 저자는 '인쇄물 한 장이라도 받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더해주는 백남준의 작은 퍼포먼스'였다고 추억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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