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인치 TV로 '무한도전'을 보며 키득거리면서도 내 아이는 거실을 서재로 꾸며 놓고 사는 교양인이 되기를 바라는 게,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이다. 늦더위 끝에 뚝 떨어져버린 기온. 아이에게 책 몇 권은 사줘야 할 것 같은 계절이 왔다. 하지만 불쑥 책을 디밀면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갑자기 무슨 책을 골라줘야 할지도 모르겠다면 자유로를 타고 파주로 가보자. 헤이리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파주 출판문화도시, 거기 온 가족이 즐거워지는 책의 나라가 있다.
한 권의 크고 아름다운 책, 북시티
파주 출판도시는 서울 마포 등에 모여 있던 출판사들이 자유로변 허허벌판에 1990년대부터 터를 닦고 옮겨와 만들어진 책의 도시다. 현재 260여개 출판 관련 기업이 들어서 있다. 일테면 산업단지인 셈. 하지만 단언코, 국가 산업단지라는 범주에 드는 클러스터 가운데 가장 예쁘다. 서울대 황기원 교수팀이 도시 디자인을 맡은 거리는 체계적으로 구획돼 있다. 거기에 주춧돌을 놓고 나지막하게 세워진 집들은 독창성과 세련미를 서로 겨루는 듯하다.
주말이면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모던한 감각에 한적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모델을 데리고 촬영 나온 사진 전문가들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본래 책을 짓고 유통하는 책의 마을. 1980년대 말부터 이곳의 터를 닦고 가꿔온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열화당 대표)은 책공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이렇게 좋은 곳을 책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업무 공간으로만 쓰는 건 아깝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겼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여기 와서까지 바글바글한 유흥지의 분위기를 내려고 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여기는 그런 오염에서 벗어난,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읽는 이들을 위한 도시잖아요. '아, 책이 이런 거구나' 하는 투명한 관찰의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북카페, 또는 활짝 열린 책 놀이터
출판도시의 골목 곳곳에는 1, 2층을 개방한 출판사들이 적지 않다. 북카페처럼 예쁘게 단장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책의 별천지가 펼쳐진다. 특히 어린이들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공간이 많다. 대개 문턱이 낮아 유모차를 밀고 어렵잖게 들어설 수 있다.
다섯수레 2층에 마련된 꿈꾸는도서관(031-955-2625)은 어른과 어린이가 책을 통해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 책 읽기 선생님이 추천한 책을 읽고 난 뒤 토론을 하거나, 목공 교실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김영사 2층의 행복한마음(031-955-3155)은 아울렛 매장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마련된 독서 공간이다.
리북어울림(031-955-6451)에선 반품된 책을 수선한 리퍼비시 도서를 무척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 한길사의 책방한길(031-955-2060)이나 열화당의 도서관+책방(031-955-7020)은 갤러리 못지않은 세련된 공간 속에 외국 도서와 시대별 고서까지 갖춰놨다. 책방과 도서관, 갤러리, 음악 감상 공간, 북카페 등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들썩한 책 잔치, '파주 북소리 2011'
10월 1일 책 읽는 사람, 책 쓰는 사람, 책 만드는 사람이 함께하는 축제가 출판도시에서 시작된다. 1,000여명의 저자와 출판단지 입주사들이 참여해 9일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노벨문학상 1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에는 앙드레 지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등 역대 노벨상 수상자 107명의 책과 편지 등이 전시된다.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자라는 아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장이 되리라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혜초, 마르코 폴로 등 대륙을 넘나든 여행자 6명의 여정을 따라 실크로드를 탐험하는 '책으로 新실크로드를 열다'와 아시아 각국의 문자를 보여주는 '아시아 문자전', 시인 고은, 문학평론가 김병익 등이 강연자로 나서는 '석학이 들려주는 인문학'도 마련된다. 출판사 100개, 저자 1,000명, 독자 10만명이 어우러지는 대규모 행사 '지식난장 한통속'도 진행된다. 문의 파주북소리조직위원회 사무국 (031)955-1733.
파주=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DMZ국제다큐영화제·헤이리 판 페스티벌도 열려
가을의 문턱, 파주에선 책잔치 말고도 개성 있는 축제가 두 가지 더 펼쳐진다.
'평화, 생명, 소통의 DMZ'를 주제로 한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22~28일 파주출판도시와 파주시 일대에서 열린다. 30개국에서 초청된 101편의 영화를 상영, 다큐멘터리의 폭넓은 스펙트럼과 가능성을 확인케 한다. 개막작은 방사능 피폭에 따른 유전자 이상으로 고통 받는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주민들의 고통을 다룬 '재앙의 묵시록'(2010).
필리핀 마닐라의 무슬림 빈민의 삶을 다룬 '워터 게토'(2011), 2010년 G20 정상회의 개최 직전 캐나다 토론토의 반세계화 시위를 다룬 '격렬의 거리' 등 12편이 국제 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아시아에서 망각의 역사에 관한 프로그램 스페셜 포커스, '북한, 다큐로 만나다'를 주제로 한 특별상영전도 볼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www.dmzdocs.com)
'파주 북소리 2011'과 같은 기간(10월 1~9일) 열리는 '헤이리 판 페스티벌'도 눈길을 끈다. 축제는 공연예술제, 시각예술제, 스페셜행사, 특별 부대행사로 구성된다. 공연예술제에서는 시 낭송과 미디어아트 등이 접목된 총체극, 10개 버스킹 팀이 벌이는 라이브 거리공연 등이 열린다.
헤이리 작가 16개 팀은 작업 공간이 개방해 방문객들이 작가와 직접 소통하고 작품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시각예술제 프로그램 중 하나인 '갤러리 연합전'에는 모두 13개 갤러리가 참여해 회화ㆍ조각ㆍ설치미술ㆍ공예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홈페이지(www.heyri.net).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파주 출판도시
●승용차로 파주 출판도시로 가려면 자유로를 이용하면 된다. 서울에서 문산 방향으로 가다 이산포IC를 지나 약 7km 더 가면 출판도시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보인다.
●대중교통도 비교적 편리하다. 200번 버스와 2200번 버스가 지하철 합정역에서 출발해 자유로를 타고 출판도시까지 직행한다. 배차간격은 15~20분. 1시간 가량 걸린다.
●출판도시 내 문화공간은 쉬는 날이 제각기 다르다. 홈페이지(www.pajubookcity.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 관람 문의는 출판도시 북샵(031-955-4386)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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