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삶은 현대인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이방인에 대한 세상의 벽은 갈수록 높고 견고해진다. 엄습하는 고독과 차별이 그들 마음에 생채기를 더한다. 저기, 뿌리 뽑힌 채 트럭에 실려 도시의 조경수로 팔려가는 소나무가 보인다. 입체회화 작가 손봉채(44)씨가 목격한 '이산'(離散)의 현장이다.
작가는 13번째 개인전 '이산의 꿈(The Dream of Diaspora)'에서 이주민 시리즈 신작과 기존 작품 등 30여점을 전시 중이다. 권력, 경계 시리즈에 이어 2009년, 이주민 연작을 시작했다. "뿌리내려 살지 못하고 떠도는 조경수 위로, 영혼마저 뿌리 뽑힌 현대인의 삶이 겹치더군요."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만난 작가는 자신의 아내 역시 26년간 뉴욕의 이민자로 살아왔다고 했다.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 이면에 이민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어느 사회나 대부분 이민자들이 사회 밑바닥을 떠받들고 있어요. 비행기나 배를 타고 타국의 땅에 들어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려울 겁니다."
구름을 뿌리 삼아 걸친 눈 덮인 소나무. 겨울처럼 시린 이주민의 마음과 정주하지 못하는 그들 모습을 투영했다. 작가는 전시장 한쪽에 안개 뿜는 기계를 놓아 관람객들이 이주민의 삶을 다소나마 짐작해보게 했다.
그의 그림은 독특하다. 최첨단 소재에 우직한 손맛을 더한 3D회화라고 할까. 작가는 유화물감과 붓을 사용하지만, 캔버스가 아닌 방탄유리 재질의 폴리카보네이트에 그림을 그린다. 한 장도 아닌 여러 장의 같거나 다른 그림을. 각각 그려낸 그림 3~6장 정도를 겹쳐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같은 그림을 그렸을 때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유화물감이 패널 표면 위에 달라붙어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백 장의 그림이 그렇게 사라졌다.
"투명 필름으로 시작해 강화유리, 아크릴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지요. 한때는 입체감을 살리려고 20~30겹을 겹치기도 했어요. 너무 두꺼워 벽에 걸 수 없거나, 많게는 280㎏까지 나가 이렇게 줄였습니다."
그런 수고 덕에 그의 작품에서는 보통의 유화에서 느낄 수 없는 입체감과 공간감이 살아난다. 작품 뒤에 깔린 LED 조명은 이런 효과를 극대화한다. 부분적으로 조명을 끄면, 수묵화 같은 농담도 실감 나게 살려낼 수 있다. 작가의 입체회화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새로운 회화기법으로 소개(2009년)됐고, 국내 특허도 받았다.
'이산의 꿈' 전은 내년 초 독일 마이클 슐츠 갤러리로 이어진다. 독일 3대 갤러리로 꼽히는 슐츠 갤러리는 손봉채 작가의 소속 갤러리다. 3년간 작가를 지켜본 마이클 슐츠 관장이 올해 초 러브콜 해, 2년 계약을 맺었다. 독일 전시에는 '이주민 시리즈' 신작만 전시된다. 한국 전시는 10월 23일까지. (02)736-4371
이인선 기자 kel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