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무더위와 피서의 추억보다는 끝도 없이 내렸던 폭우와 재해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두려움의 기억을 남겼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더웠는지 추웠는지 잊겠끔 다음 계절은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어느새 곁에 와 있다. 철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다짐과 함께 그 계절을 만끽하고픈 마음이 든다. 아침저녁으로 들어오는 갑작스런 찬 공기에 드디어 가을이 왔음을 느끼며 문득 비발디 사계(四季)가 떠오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소재로 한 음악은 하이든, 차이코프스키 등 몇몇 작곡가들의 작품이 있지만 그 중 유명한 '비발디의 사계'와 여기에 대적할 만한 또 하나의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계'를 대표적인 곡으로 꼽을 수 있다.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는 베네치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면서 15세의 나이로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그 시대 이탈리아의 많은 백성들은 경제 및 정치, 교황청의 부패로 말미암아 의식주의 고통에 시달렸다. 게다가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힘든 삶이 계속되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사제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비발디는 어려움 없이 버려진 어린이들을 사제관으로 데려와 키우고 교육을 시켜줄 수 있었다. 그의 독특한 빨간 머리 때문에 아이들은 '빨간 머리 신부님'이란 별명을 붙였다. 그는 음악과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로 사제의 일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연주곡을 직접 작곡하여 음악교육은 물론 학생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를 시키는 등 음악활동이 본업이 되었을 정도로 전념하였다.
비발디 4계는 그가 거의 50세쯤 됐을 당시 12곡의 협주곡을 작곡한 것 중 4곡에 속하는 것으로 소제목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비발디 자신이 붙였다. 특히 이 곡은 각 악장마다 소네트(sonnet : 정형시의 종류, 작은 노래)가 악보에 실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시를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 계절마다 바뀌는 정경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한 '보이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비발디 사계가 클래식 애호가들의 호감도 1위의 자리를 수 년 동안 지켜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또 한명의 사계 작곡가 피아졸라((1921~92)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리에스 출신의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탱고 작곡가이다.
아르헨티나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외세의 침략이 빈번하였고 비극적인 사회적 환경 때문인지 조국애, 민족애가 높았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서민 춤사위로서 국민적 자존심과 예술성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종합 무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20세기 초까지 아르헨티나의 탱고음악은 무용음악 반주 수준으로 비중이 크지 않은 장르였다. 이런 상황에서 피아졸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탱고 스타일로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 발전시키며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시대를 열게 한 장본인으로서 '탱고의 혁명가, 이단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피아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계'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탱고의 도시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며 이 곡은 처음부터 조곡(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무곡) 형태로 작곡된 것은 아니었다. 피아졸라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 따로 존재하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제로 한 4개의 곡을 모아 기돈 크레머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새롭게 편곡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계'라는 이름으로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환경과 음식 및 문화적 정서가 우리나라와 비슷해서인지 쉽게 친근감을 준다.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피아졸라의 사계를 이번 가을에 추천하고 싶다.
송재광 이화여대 음대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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