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대동조선 인수전 본입찰을 앞두고 최종 가격에 고민하던 STX실무팀에게 강덕수 회장은 슬며시 쪽지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엔 "시너지를 생각하세요,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가격을 써내야죠"라는 한마디가 써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실무팀은 경쟁자들이 500억원대의 인수가를 제시할 때 두배인 1,000억원을 베팅하며 대동조선(현 STX조선)을 품에 안았다.
이처럼 강 회장의 기업 인수 철학에는 한가지 원칙이 있다.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아도 미래 가치가 있다면 과감하고 신속하게 베팅을 한다는 것. 이 철칙을 통해 그는 불과 10년만에 STX를 재계 12위 그룹으로 키워냈다.
쌍용중공업 전무였던 그는 2000년 퇴출대상기업이 된 쌍용중공업의 주식을 직접 사들이며 오너로 변신했고, 이듬해 5월 STX를 출범시켰다. 이어 ▦같은 해 10월 대동조선 ▦2002년 산단에너지(현 STX에너지) ▦2004년 범양상선(현 STX팬오션)를 차례로 인수했다. M&A 드라이브는 해외로도 이어져 2007년엔 세계 최대 크루즈선 건조업체인 아커야즈(현 STX유럽)을 사들였고 2009년에는 네덜란드 풍력발전기 제조업체인 하라코산유럽 인수를 통해 STX윈드파워를 설립했다.
그런 STX가 지난 19일 하이닉스반도체 입찰중단을 선언했다. 이유는 "세계경제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대규모 투자가 경영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 미국 유럽 사정을 감안할 때 맞는 판단이긴 하지만 재계에선 "과감하고 공격적이었던 강 회장의 경영스타일이 신중모드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사실 STX에게 하이닉스는 특별했다. 지금까지 인수했던 기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형물건이어서, 만약 사들이기만 한다면 STX는 단번에 재계 톱10에 진입할 수도 있었다. 또 조선 엔진 발전 등 전형적인 '중후장대(重厚長大)'기업이었던 STX로선 첨단 IT기업인 하이닉스를 통해 사업포트폴리오도 단번에 재편할 수 있었다. 비록 인수자금 부담이 크다 해도, 과감하게 '베팅'할 매력은 충분했다는 얘기다. 한 재계 관계자는 "만약 예전이었다면 STX는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하이닉스를 인수했을 것"이라며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강 회장의 스타일이 확실히 신중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강 회장의 과감한 베팅이 매번 성공한 것만은 아니다. 2004년 인천정유, 2008년 대한통운 인수전에선 각각 고배를 마셨고 2008년 대우조선해양과 작년 대한조선 인수시도는 조건이 맞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다. 또 다른 재계관계자는 "STX가 최근 3,4년간은 국내 M&A에서 중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고 특히 대한통운이나 대우조선 같은 대형매물에선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서 "그룹규모가 커지면서 공격일변도의 베팅을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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