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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꼴사나운 '읍참중경(泣斬重卿)'

입력
2011.09.2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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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이 총애하던 재사(才士)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벴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 일화엔 추상같은 기강을 위해 수족을 내치는 비장한 눈물의 드라마가 있다. 그 눈물의 진심을 뒷받침하는 건 삼국지를 관통하는 제갈공명의 흐트러짐 없는 충심이다.

청와대가 정전대란의 책임을 물어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을 단칼에 내칠 기세다. 최 장관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을 감안하면 '읍참중경(泣斬重卿)'인 셈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읍참'엔 흩뿌려지는 눈물도, 추상같은 기강도, 드높은 충심도 느껴지지 않는다. 앞뒤 생각조차 없이 급한 불만 끄면 된다는, 애처롭고 꼴사나운 '꼬리 자르기'만 보일 뿐이다.

문책의 엄정함이란 징계의 혹독함을 뜻하는 게 아니다. 책임을 엄밀하게 따져 실패의 경위를 밝히고, 모두 다 납득할 만한 징계로 후일의 귀감을 삼자는 것이다. 따라서 문책과 징계는 합당한 논리에 의해 마땅한 수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정전사태에서는 이런 전제가 깡그리 무시된 채 덮어놓고 장관 문책론부터 부각됐다. 들끓는 여론의 화살을 맞아줄 희생양부터 만들어내자는 식이었다.

선거만 의식한 청와대의 퇴진론

초유의 국가적 재난이 빚어진 만큼 야권이 장관 퇴진론을 제기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나서 다급하게 퇴진론을 증폭시킨 행태는 안쓰럽기 짝이 없다. "좀 더 면밀하게 원인ㆍ과정의 잘못을 살펴봐야 할 것"이라는 여권 내의 지적은 집단 린치하듯 여기저기서 불거진 사퇴론에 묻혀버렸다. 대통령이 한국전력을 질책하자, 청와대는 즉각 "최 장관 스스로 거취를 판단할 일"이라는 얘길 흘렸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는 애매한 얘기로 힘을 보탰다. 청와대의 압박은 결국 "책임지고 물러나는 게 도리"라는 핵심 관계자의 발언까지 나아갔다.

청와대의 행태가 고약한 건 퇴진론에 앞장섰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방식이 더 문제다. 장관 퇴진의 합당한 논리조차 세우지 않고 청와대 관계자라는 익명의 입을 빌려 여기저기서 난도질을 하는 식으로 퇴진론을 언론에 흘려댔다. 대통령의 의중이 퇴진이라면 먼저 차분하게 대통령의 뜻을 당사자에게 전하고 스스로 진퇴를 결정할 수 있게 여지를 줬어야 한다. 그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장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청와대는 그 동안 들끓는 퇴진론에도 불구하고 불법과 실책, 과오를 저지른 수많은 인사들의 자리를 보존해줬다. '불통인사'나 '오기인사'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천안함 사태 정보처리 미숙과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킨 국가정보원장, 불법사찰로 거센 퇴진론을 부른 전 총리실 국무차장, 북미 고위급군사회담 관련 외교기밀을 누출한 전 통일부장관과 최근 일반의약품 슈퍼마켓 판매 파동을 일으킨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이 대통령은 국민적 문책 요구에 맞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랬던 청와대가 이번에 다급하게 나선 건 당장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10ㆍ26 보선과 내년도 총선, 대선 일정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표가 더 떨어지기 전에 장관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한나라당의 요구에 휘둘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문책과 징계 엄정한 관행 필요

당청이 최 장관을 두둔해야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또 평소에 자신이 아무리 소신 있게 정책을 폈다 해도 '우군'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건 최 장관 개인의 실덕일수도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최 장관이 사퇴하더라도 문책의 논리만은 분명히 해둬야 할 책임이 있다. 한전이 지경부 유관기관이기 때문에 장관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이라면 대통령은 분기마다 한 번씩 퇴진해야 한다. 따라서 정전사태에서 장관의 직접적 실책이나 직무유기가 있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실무진의 실책에 대해 장관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묻는 것이 합리적인지에 대해 공감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한다.

장관 한 명을 '읍참'해서 정치적 타산을 맞추는 것보다, 문책과 징계의 엄정한 관행을 만드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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