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만원 대출 한도의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한 지 10년도 넘었다. 딱히 대출의 필요성을 느꼈다기보다는, 주거래은행 창구 직원의 권유로 얼떨결에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생활하다 보니 급전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생겨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소득은 좀체 늘지 않는데 아이들 교육비 등 씀씀이는 커지고 물가는 치솟으니, 이제 마이너스대출이 없으면 생활이 가능할지 걱정될 정도다. 물론 응분의 대가는 치르고 있다. 10년 이상 꼬박꼬박 이자를 냈고, 지금도 두 자릿수 가까운 이자를 부담한다.
시장금리와 거꾸로 가는 대출금리
개인 신용으로 빌려주는 돈이니, 담보대출에 비해 비싼 금리를 받는 건 이해가 간다. 한데 이상한 것은 시장금리가 내려도 금리 깎아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리가 내렸으니 반영해달라고 닦달하면, 마지못해 0.1~0.2%포인트 깎아주는 시늉을 하는 게 고작이다. 반대로 시장금리가 오르면 득달같이 금리를 올리겠다고 통보해 온다. 그것도 시장금리 인상분보다 훨씬 큰 폭으로. 최근에도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가계 빚을 줄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금리를 1.1%포인트 올리겠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석 달째 금리를 동결해 시장금리는 계속 떨어진다는데, 한꺼번에 그리 많이 올리겠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비 올 때 우산 빼앗는 곳'. 금융소비자들이 '은행'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다. 평소에는 돈을 쓰라고 부추기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이에나마냥 매몰차게 돌변해 빚 독촉을 해대는 탓이다. 은행들은 올해 상반기에만 10조원 이상의 순익을 냈다. 정부의 가계 빚 억제 대책에 기대 각종 대출금리를 올리는 추세여서 올해 사상 최대 이익을 거둘 게 확실시된다. 반면,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000조원을 넘어섰고, 개인의 부채 상환 능력은 금융위기 직전의 미국에도 못 미칠 정도로 심각하다. 가히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인 셈이다.
가계 빚이 늘어난 데는 정부와 은행의 책임도 크다. 정부는 침체된 부동산 경기를 살리기 위해 빚 내서 집을 사도록 부추겼고, 은행들도 돈벌이를 위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는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해 가계대출을 경쟁적으로 늘려왔다. 대출 구조도 금리 인상이나 주택가격 하락에 취약한 변동금리가 90%를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가계 빚이 심각하니 금리를 올려 대출을 억제하겠다는 것은, 서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지금처럼 은행들이 금리를 올려 대출 수요를 밀어내면 서민들은 조건이 더 열악한 제2금융권을 찾을 수밖에 없고, 결국 가계의 빚 구조는 더 악화할 게 뻔하다.
물론 은행의 돈벌이를 탓할 수는 없다. 몸집 불리기로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은행들이 사상 최대의 수익을 내는 건 정상이 아니다. 은행은 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한 사회의 필수 기반시설이다. 은행이 경제 인프라로서의 공공성을 망각한 채 자기 배만 불리는 것은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서민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면서 은행 배만 불리는 방식으론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과도한 이자 마진과 불합리한 수수료 체계를 바로잡아 가계와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을 도와야 한다. 그래야 은행도 지속 가능한 수익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은행에 자금 중개라는 엄청난 권력을 부여한 이유를 잘 생각해야 한다.
비 올 때 우산을 주는 은행
은행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입버릇처럼 고객과 함께 하는 따뜻한 은행이 되겠다고 말한다. "비가 오지 않을 때 우산을 빌려주고,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뺏는 그런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 강권석 전 기업은행장이 입버릇처럼 설파했던 '우산론'이다. 최근 서진원 신한은행장도 "비 올 때 제일 먼저 우산을 뺏는 은행이라는 오명을 씻겠다"고 다짐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 바란다. 은행의 화려한 돈잔치 밑에서 신음하는 서민들과 중소기업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된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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