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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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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비밀

입력
2011.09.2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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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스웨터 먼지처럼 잔잔히 부서지던 햇빛, 백엽상 주위엔 한 뼘도 못 자란 풀들이 뿌리 뽑힌 채 말라가고 있었다 얼굴이 하얀 아이들 쫓아다니다가 일기장을 찢어 풍금 바람통 속에 넣어 두었다 돌 미끄럼틀 주위를 뛰어다니다 보면 자주 멍이 들었고 동물의 허파를 삶아 잘라놓은 듯 멍 자국이 둘레를 키워가는 동안 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빨아야 흘러나왔던 수돗물에 입술을 적실 땐 갑작스런 코피처럼 내내 떠나지 않았던 녹 비린내, 곧 여행의 끝이 오리란 걸 알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라도 시솔레 음계를 외며 어린 소녀가 철골 비계를 올라갔다 텅 빈 멜로디를 따라 바람통이 종이 쪼가리들을 날려 보냈다 온실 유리를 깨뜨렸고 복도 끝에선 오래, 호루라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낡은 풍금들이 트럭에 실려 떠나가는 꿈, 깨진 유리 밑엔 난초가 만개한 꽃을 걸어놓고 부드럽게 썩어가고 있었다

* * *

햇빛의 느낌. 빛 속에서 너무 조금만 자랐던 풀들. 자주 넘어져서였을까요? 맞아서였을까? 얼굴에 동물의 삶은 허파를 잘라놓은 듯 검푸르게 멍이 퍼져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시 속의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아이의 마음을 적어놓은 일기장은 아주 오래 전에 조각조각 찢어져 바람결에 날아갔으니 찾을 수 없습니다. 그때 온실 유리를 왜 깨뜨린 거니? 깨진 유리 밑으로 만개한 꽃을 달고 썩어가는 난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거니? 그 이유와 생각들이 아이의 비밀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했어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삶 전체에 어떤 의무를 부여하지만, 물론 그 의미는 그 사람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한 모든 헛된 관심으로부터 그를 구한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평론가의 블로그에서 살짝 가져온 구절입니다. 그가 누구냐구요? 비밀이에요. 우린 어딘가를 몰래 바라보며 혼자 좋아하고 슬퍼하는 비밀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시인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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