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5 정전사태의 상황은 당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력거래소가 발표한 순환단전 직전의 예비전력은 343만㎾. 5시간 예열을 한 뒤에야 전기 생산이 가능한 발전기의 발전용량 202만㎾, 여름철 기온상승에 의한 발전효율 저하분 117만㎾가 포함된 수치였다. 이를 빼면 실제 예비전력은 24만㎾, 전력예비율 0.35%에 불과했다. 당시 소비전력량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대정전(大停電), 즉 블랙아웃 사태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초비상 상황이었다.
나라가 주저앉을 뻔했던 정전
전력공급망이 하나로 연결돼 있는 우리나라는 순간적일지라도 전력소비량이 전체 공급량을 넘을 경우 전국의 전력망이 마비된다. 대한민국 전체의 일반가정은 물론 정보ㆍ통신ㆍ금융, 산업시설 등 모든 국가 핵심 기반시설에 전기가 끊겨 마비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멈춰선 발전소를 재가동하고 전력망을 복원해 전국에 전력 공급을 정상화하는 데는 최소 사흘에서 1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사태다.
그 심각성에 비춰보면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은 약과다. 그런 위기상황에서 정부의 대처는 어떠했는가. 주무장관인 최중경 지식경제부장관은 단전사태 보고를 받고도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다. 단순 정전으로 쉽게 생각한 탓이다.
이 정부 들어 4 차례 개편ㆍ강화된 청와대 위기관리실이 단전 사태 대처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기반이 통째로 주저앉아버릴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는데도 주무장관과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청와대에서 한가하게 만찬을 즐긴 셈이다.
정전 이후 대응 과정도 허점투성이다. 불가피하게 순환정전에 들어가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원인 규명에 중구난방이고 지식경제부와 한전, 진력거래소가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당시의 전력예비율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사실도 사흘 뒤에야 알았다. 우왕좌왕, 혼선, 책임 떠넘기기 등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 그리고 구제역 사태 때 익히 봐왔던 행태들이 어김없이 재연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전 사태 다음 날 한전을 찾아가 "기본을 지키면 이런 문제가 일어날 수 없다. 여러분은 세계적인 국영회사라고 할지 모르지만 형편없는 후진국 수준"이라고 질타했다. 하지만 이 정부 들어 되풀이되고 있는 위기관리 실패에 이 대통령 자신도 책임이 없지 않다. 한전과 한전 자회사의 주요 임원들을 전문성이 부족한 낙하산 및 보은 인사로 채워놓고 이들이 위기상황에 원활하게 대처하기를 바랄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도 이 대통령과 이 정부에 위기관리 철학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앞선 정부들은 분명한 위기관리 개념을 갖고 위기 상황 별 매뉴얼 작성 등 나름대로 대응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현 정부는 전 정부가 구축한 위기관리 체제를 축소하고 애써 만들어 놓은 위기대응 매뉴얼을 선반에 올려놓고 돌아보지 않았다. 광우병 촛불시위, AIㆍ구제역 사태, 천안함ㆍ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위기대응 체제를 보완한다고는 했다. 하지만 최고통치자의 확고한 철학과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제도 운용에 힘이 실릴 수 없다.
상상력ㆍ유연성도 갖춘 대처를
위기대응 시스템과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다 해도 운용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유연성과 창의성을 갖고 대처하지 않으면 오히려 매뉴얼이 굴레로 작용할 수 있는 탓이다. 고(高)매뉴얼 사회로 칭송을 받는 일본이 전례 없는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사고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키웠던 예가 잘 말해준다. 이번 정전 사태에서도 늦더위라는 이상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기존 매뉴얼에 따라 발전소 정비에 들어가 화를 키웠다.
9ㆍ11사태가 그랬듯이 천안함ㆍ연평도 사건, 이번 정전사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찾아왔다. 최고통치자의 위기관리 철학, 그리고 위기 대응 주체의 상상력과 유연성이 없이는 이런 류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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