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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플래시백] <1> 나이가 왜 숫자에 불과해? 나이는 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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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플래시백] <1> 나이가 왜 숫자에 불과해? 나이는 현실이야

입력
2011.09.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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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화요일마다 한국일보 독자분들과 만나게 됐습니다. 나이 먹은 게 뭔 벼슬이라고… 이런 거 안 하려고 했는데, 내 얘기를 재미있어 할 사람이 있을 거라네요. 한 번 속아보지요, 허허. 그리 길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뭐 대단한 얘깃거리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요. 그냥 살아온 얘기, 요즘 드는 생각을 두서 없이 늘어놓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랑 얘기를 나누러 온 기자가 새파랗게 젊네요. 정서가 통하려나? 아무튼 한번 시작해 보지요. 말투는 그냥 편하게 하겠습니다.

젊어 보인다고? 실없는 소리는. 1940년, 경진년에 났으니까 내가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 둘인가? 오전 6시만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 걸 보니 이제 나도 영락 없는 노인이지. 한물간 취급 받을까 봐 나이 얘기는 되도록 안 하려 하지만, 괜히 없는 기운 나는 것처럼 유세 떠는 게 더 추레한 거야.

내가 요새 KBS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데 이거 처음 할 때도 많이 망설였어. 작년 10월쯤 PD가 섭외하면서 그러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지방에서 하룻밤 잠도 주무셔야 하고…." 고민이 되더라고. 칠십 먹은 내가 자동차를 타고 네 시간, 다섯 시간씩 이동할 수 있을까. 어디 섬에라도 들어가자면 가고 오고 꼬박 이틀을 길에서 시달려야 하는데 말이야.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꾸 녹슬고 닳고 풍화작용을 일으키게 돼 있어. 거스르려 들면 안 돼. 젊은 척할수록 흉하게 날개도 없이 떨어지는 거야. 방송국에서 '노인적 문제'를 보필해 주겠다고 약속해서 결국 용기를 냈지. 차 오래 타서 허리 아픈 것 말고는 불편한 게 없어.

이게 전국 방방곡곡을 매주 돌아다녀야 하는 건데도 말야, 올해 1월 첫 방송부터 지금까지 한 번의 트집 없이 방송을 한 게 내가 봐도 대견해. KBS나 제작사에서도 신통해 하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떠들어대지만, 그건 숫자가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야. 내가 지금 이 나이 때까지 방송을 할 수 있는 것은 젊음에 대한 헛된 집착이 없어서가 아닐까 싶어.

맞아. 젊을 때부터 쭉 나이든 역할만 해온 탓인지도 모르지. '전원일기' 김 회장 때부터냐고? 아냐, 그것보담두 훨씬 오래됐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연극과에 들어갔는데, 처음 한 연극이 '저 하늘 아래'라는 작품이야.

내 역할은 원래 연출자였지. 근데 40대 후반 남자 역을 맡은 친구가 연기를 영 어색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시범을 보였는데, 그걸 본 지도교수님이 "야, 중년 남자 역할은 아무래도 너다" 그러시데. 졸지에 연출에서 배우로 바뀐 거지. 그 뒤로 내 역할은 십중팔구 노인이었어. 이건 뭐, 활동 무대를 연극에서 TV로 옮긴 다음에도 좀체 바뀌지가 않더라고.

서른두 살 땐가, MBC '아버지'라는 드라마에선 정년퇴직한 일흔 살 할아버지 역할을 맡았어. 내가 이 할아버지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겠는 거야. 지금 서른두 살이면 아주 앳된 나이 아냐? 그래서 노트를 갖고 서울역에 나가서 사흘을 죽치고 있었어. 지나가는 노인들 얼굴도 그려보고, "어떻습니까, 지금 심경이" 하고 묻기도 했지.

학교 교장 선생님도 열 명 이상 만났어. 그렇게 해서 배역을 소화해냈더니 어느새 나한테 '노역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데. 이 얼굴 갖고 노인 역할 말고 뭘 할 수 있었겠어. 신성일, 최무룡 같은 쟁쟁한 선배들이 날리던 시절인데. 하긴 그때는 흑백TV인데다가 대충 메이크업으로 나이를 속일 수 있을 때였으니까 가능한 얘기야. 솜털 하나까지 TV에 다 나오는 요즘 같았으면 어림 없었겠지.

근데 이거 무슨 말을 하다가 케케묵은 시절 얘기로 빠진 거지? 아, 맞다. '한국인의 밥상.' 각설하고 이건 내 나이에 무리일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인식하고 있어서, 오히려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것 같단 얘기야.

조금 다른 맥락인데… 나는 연기도 나이만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똑 같은 배역이라도 인물에 대한 판단과 해석이 스무 살짜리하고 예순 살짜리가 다를 수밖에 없잖아. 신구 선배나 김혜자처럼 아직 활발히 연기하는 사람들, 그렇게 잘할 수 없어 보이는 것도 결국 세월이 지닌 힘이겠지.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건, 그래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얘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엉터리 배우인지 몰라.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이 먹은 역할을 했잖아. 아역이 아니라 노역 배우 출신이지. 아쉽다기보단 죄스러워. 연령의 때가 있고 경험이라는 게 있고, 사람이 살다 보면 뭘 하나 배우고 깨우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서가 있는 건데… 길 가다가 동년배들과 마주치면 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곤 이렇게들 얘기? "아니, 저랑 비슷해 보이시네요? 아흔은 넘으셨을 줄 알았는데."

어떤 의미에서 속여왔던 거지. 연기자로서, 시청자와 작품과 또 나 자신을. 나더러 한국인의 아버지상이라는 말 많이 하잖아. 사실 나도 잘 모르는 한국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시청자들은 TV를 보면서 내 얼굴에서 떠올리고 있었던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 내가 이십대 때 게리 쿠퍼, 존 웨인 같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근데 말야, 이제 진짜 오롯이 내 나이를 밑천 삼아 할 수 있는 노역이 들어온다면 신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예컨대 110세 노인 역할. 그런 역을 맡게 되면 열심히 비슷한 연배를 찾아다니며 관찰하겠지. 걸음은 이렇게 걷는다, 말은 이런 식으로 한다, 그런 걸 연구해서 내 몸에 색깔을 칠하고 만드는 거지.

'인간 최불암'이라는 재료를 갖고 캐릭터를 빚는 거야. 배우로서 그만큼 매력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못했잖아. 나는 그냥 생명 기능만 있는 사람이고 메이크업만 하면 누구로든 변신해야 했지. 마치 악기처럼, 높은 음 건반을 치면 높은 소리를 내야 하는.

요즘은 드라마는 안 하고 교양프로그램 하고 있는데 가끔 생각해봐. 이 사람들이 왜 다른 연예인 놔두고 나를 불렀을까. 칠십 먹은 최불암이를, 대본 있는 드라마도 아닌 프로그램에서 왜 필요로 할까. 내 나이에 TV라는 매체를 통해 전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런 생각들이야.

지난주 시작한 KBS '스카우트'란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는데 이게 고등학생, 고졸 젊은이들 취업을 도와주는 거야. 예를 들어 요리사다 그러면 처음 500명에서 시작해 100명, 10명, 5명 이런 식으로 추려가.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거 찾아서 정진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더라고. 내가 그렇게 살아왔거든. 쉽지만은 않았지만. 내 나이 되니까, 그런 역할이 자연스러운 거지. 젊은이들 사이에 코믹하게 섞여 있더라도 말야.

나이 먹는다는 거. 그거 억지로 외면할 것도, 꼭 슬픈 일도 아닌 것 같아.

정리=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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