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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시민사회 '새로운 체제' 논의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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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시민사회 '새로운 체제' 논의 본격화

입력
2011.09.1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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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 현상은 체제위기 반영…양당 정치 구도 한물 갔다"

"안철수 현상은 기성 체제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다."(김호기 연세대 교수) "보수든 진보든 현 체제에 대한 레드카드다."(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장)

안철수 현상이 단순한 정치 불신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체제 위기와 결부된 것이란 분석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복지담론'이 시대적 의제로 떠올랐지만, '복지 더 주기'가 아니라 정치, 경제, 노동 등 사회 전반의 구조를 바꾸는 획기적인 체제 변화가 절실하다는 진단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5월 '큰 원(願)을 세워 2013년 체제를 만들자'고 제안한 후, 안철수 현상까지 겹쳐지면서 '새로운 체제' 구성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하고 있다.

체제 위기로서의 안철수 현상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철수 지지층은 그간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던 부동층 혹은 무당파층으로 분류되는데, 특히 2030세대와 40대 화이트칼라, 여성이 핵심 지지 기반이다. 양당 정치구도 바깥에 있던 광범위한 부동층이 안철수라는 새 인물에 쏠린 셈인데, 이를 탈정치 현상의 재연이 아니라 현 정치 구도를 포함한 체제 위기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 정치구도에 실망한 부동층이 실력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언제든 정치에 적극 참여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라며 "탈정치라고 기성 정치권이 훈계할 게 아니라, 정치권 자체가 변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는 일자리, 주택, 교육, 보육, 노후 등 일상을 지배하는 우리사회 시스템 전반이 고장 났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현 체제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도 "안철수 현상은 그 지지층이 안고 있는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에 따른 삶의 질 저하와 불안 등 사회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초기 동력 소진

현 체제의 성격을 두고 그간 진보 학계에서는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형성된 '87년 체제'로 보는 관점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형성된 '97년 체제'로 보는 관점이 양립해왔지만, 양측 모두 현 체제가 위기라는 데는 일치한다.

'87년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학자들은 현 체제가 민주화를 통해서 각 부문이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 권리를 찾기 시작했으나, 서로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김종엽 교수는 "재벌은 경제적 영역에서 강한 헤게모니를 구축했는데 이를 견제해야 할 노동운동도 퇴행했다"며 "대기업 노조 중심의 민주노총도 특수 이익 추구자로 변질돼, 이 양자(재벌과 대기업 노조)가 시장의 약자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대립을 해결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고 말했다.

진보진영도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더욱 단도직입적이다. '87년 체제'가 독재권력을 몰아내고 개인ㆍ기업ㆍ집단의 자유로운 권익 추구를 보장한 체제였으나, 이를 조정할 투명ㆍ공정ㆍ공평의 공공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세력도 보수와 마찬가지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비전 없이 스스로 억눌려온 약자라는 확신을 깔고 자기 권리 찾기에 매진해온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 같은 시각에서 새 체제의 핵심 의제로 복지국가와 함께 공정ㆍ공평 사회 등을 제시한다.

현 체제를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97년 체제'로 보는 학자들은 형식적 민주주의는 정착됐으나 경제적 민주화가 실패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한 것이 위기의 핵심이란 입장이다. 김호기 교수는 "한진중공업 사태에서 드러난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을 위해 노동시장 개혁과 재벌개혁, 보편적 복지가 새 체제의 핵심 의제다"고 말했다.

낡은 양당 정치구도를 넘어

위기를 보는 관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현 양당 중심의 정당 정치가 이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다는 지적은 한결 같다. 각 계층을 대표해야 할 정치권이 지역을 토대로 서로 적대적인 의존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이익 추구에만 빠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성 정당들이 젊은 세대의 감수성과 열망을 담아 내지 못해 세대 교체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진보나 보수의 이분법적 잣대로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질, 창의적 상상력, 공공성 등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커지는데, 현 정당은 권위는 권위대로 부리면서 약속 안 지키는 아버지 역할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1990년대만 해도 정치권엔 젊은 세대 충원이 많았으나, 지금은 젊은층을 대표할만한 정치인이 거의 없다. 김 교수는 "2008년 촛불집회에서 젊은이들이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며 축제 같은 시위를 벌였는데, 이후 정치는 좌우 논쟁만 심해지면서 더욱 경색돼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고, 사회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선 양당 구도를 넘어서는 새 판짜기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온다. 범 진보 학계의 좌장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새 체제에서는 양당을 넘어서 소수 정당들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체제 개편이 필요하다"며 "선거법 등을 바꿔 복수 정당의 연립 정치 구도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진보진영 "2013년 체제로"

진보진영의 학계와 시민단체, 정당을 중심으로 '2013년 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다.

체제 개편 논의의 틀은 지난 7월 26일 시민사회 원로 13명과 8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가 중심이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해찬 전 총리,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문성근 혁신과통합 공동대표,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이 참여하는 범야권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기구다. 시민단체 중심이던 원탁회의는 지난 5일 야4당 대표도 참여하면서 시민단체와 정당 등 범야권의 협의체로 발전한 상태다.

체제 개편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원탁회의는 범야권 통합 후보를 내는 논의와 체제 개편을 위한 정책 창출 등 두 갈래로 진행중이다. 원탁회의에 참여한 정현곤 세교연구소 이사는 "이번 주 각 정당의 정책위의장 급과 각 시민단체의 정책 담당자들이 모여 구체적인 틀을 만들어 본격적인 정책 논의에 들어간다"며 "정책워크숍, 국민토론회 등을 거쳐 11월에는 '2013년 체제'의 정책 방향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범야권 통합후보를 내는 논의도 맞물려 진행되는데, 당장은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야권 통합후보 선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올해 안에 정책 방향이 모아진다 해도 내년 총선 대선 국면에서 야권 통합후보 논의가 원활하게 진행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2013년 체제론' 제안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새 정부가 들어서는 2013년에 새로운 체제를 만들자는 제안을 처음 꺼낸 이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가 지난 5월 실천문학 여름호에서 '2013년 체제를 준비하자'는 제안을 한 이후 범야권에선 '2013년 체제론'이 화두로 떠올랐다. '87년 체제'가 초기의 동력을 탕진하고 말기국면을 맞았다는 진단과 함께 새 정부에서 '평화체제, 복지국가, 공정ㆍ공평사회'라는 큰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 그의 요지다. 17일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의견을 들어봤다.

-최근 불거진 안철수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를 개인적으로 모르지만 소중한 인재라고 생각한다. 이번 서울시장 후보를 흔쾌히 양보하는 것을 보고 양식도 갖춘 분이라 느꼈다. 그런데 안철수 현상은 이와 별개로 봐야 한다. 기존 정당의 정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반영된 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측면도 있다. 보수언론이 조장하는 '정치하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의식은 결과적으로 기득권 세력에 득이 되는데, 안철수 현상에는 이런 면도 있다. 기존 양당에 대한 정당한 비판 의식과 함께 정치 자체에 대한 과도한 불신과 혐오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안철수 현상 발원지이자 기성 체제의 들러리였던 젊은 세대를 끌어안으려면.

"이들을 끌어안는다기보다, 새 체제를 만드는데 이들이 주체가 돼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새 체제를 만드는 데 젊은 세대의 동력이 작용해야 한다. 기성 세대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당 구도에 대한 불신 상당한데, 새 체제의 정치구도는.

"양당 정치구도는 이미 변화를 맞았다. 야권에서 민주당이 압도적 위치에 있지만, 민주당 혼자 집권할 수 있다는 얘기를 안 한다. 그래서 연합정치 얘기가 나온다. 먼저 2012년 선거에서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내려져야 전면적인 개편이 가능하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꽤 세력을 갖는 정당들이 나오고 이를 토대로 연립정치가 돼야 한다고 본다. 소수 정당들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체제 개편이 필요한데, 길게 보면 선거법을 바꾸고 비례대표제를 더 확장해서 복수정당의 연립정치 구도가 돼야 하지 않을까. 야권이 이를 공동의 선거공약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와 야당간 논의가 야권통합 후보를 내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데, 기존 민주당 체제로 흡수되는 것은 아닌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박원순 변호사가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민주당 체제로 흡수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거다. 그가 야권통합후보가 된 후 검토 끝에 2번 기호(민주당)를 달고 나설 수도 있겠지만, 민주당 체제에 흡수되는 식은 아닐 것이다. 민주당 개혁 등 유권자들이 납득할 방안이 나와야 입당할 것인데 그 자체가 기성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 본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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