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 안에 4,600억원을 들여 설치하기로 한 중이온가속기(KoRIA) 사업이 첫 단계인 개념설계가 끝난 올 1월 이후 8개월째 제자리 걸음이다.
이러다가 시설만 지어놓고 20년 가까이 변변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중국 현대물리연구소 중이온가속기(HIRFL)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과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는 외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의 일정이 늦어져 어쩔 수 없다는 궁색한 해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중이온가속기는 과학벨트의 핵심이다. 핵물리, 생명과학 등 다양한 연구에 쓰이는 대형장비로, 가속기 본체만이 아니라 가속기에 딸린 별도의 연구시설이 여럿 필요하다. 실제로 KoRIA 개념설계에는 가속기 본체 외에 연구시설 7개를 설치하기로 돼 있다.
가속기 본체 개념설계는 지난해 11월, 연구시설 개념설계는 올 1월 끝났다. 그러나 8개월이 넘도록 다음 단계인 상세설계엔 손도 못 대고 있다. 5월 일각에서 가속관 설계의 표절 의혹이 제기되자 교과부가 7월 뒤늦게 국제자문위를 구성해 가속기 건설의 타당성을 평가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연구시설 상세설계는 물론, 가속기 운영 인력 양성에 관한 논의 등 모든 과정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연구시설 개념설계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연구시설과 인력 양성까지 손을 놓아버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현장의 많은 과학자들이 KoRIA가 중국 HIRFL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란저우(蘭州) 현대물리연구소의 HIRFL는 건설 당시 우주의 탄생과 변화, 암 치료 등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가속기 건설에만 매달리느라 연구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지금은 실험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열쇠를 쥔 국제자문위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 자문위는 당초 8월 종합보고서를 내고 최종 결론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껏 한 차례 화상회의를 했을 뿐이다. 위원 7명 개개인의 휴가와 바쁜 일정 탓에 조율이 쉽지 않다는 게 교과부의 설명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10월 초에는 보고서를 낼 수 있도록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외국 전문가들의 개인 일정이 KoRIA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사업 추진이 차일피일 늦어지는 사이 연구시설 개념설계에 참여했던 대학교수, 석ㆍ박사 등 12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다른 연구를 맡았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데 무조건 시간 비우고 기다릴 순 없지 않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대해 교과부 관계자는 "인력 양성이나 가속기 활용은 연말 새로 출범하는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단이 맡아 진행할 계획"이라며 "가속기 완공까지 5년 이상 남아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5년은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다. 한국엔 가속기로 실험해본 과학자가 적은데, 미리 인력을 키워두지 않으면 가속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겠냐"고 반박했다.
●중이온가속기
전자보다 40만배 무거운 중이온을 빛의 속도(초속 30㎞)로 가속시켜 충돌시키는 대형장비다. 이때 만들어진 희귀동위원소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소로 핵물리, 생명과학 등 다양한 연구에 쓰인다. 한국형 중이온가속기(KoRIA)는 원형가속기와 선형가속기가 연결된 세계 유일한 가속기다. 지름 10m인 원형가속기에서 만든 희귀동위원소를 다시 길이 700m인 선형가속기에서 충돌시키면 더욱 얻기 힘든 원소를 만들 수 있을 걸로 보고 있다. 역대 노벨 물리학상의 20%가 가속기를 이용한 연구에서 나와 가속기는 '노벨상 제조기'로도 불린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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