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6일 오전 5시30분쯤 전남 순천시 황전면 백모(61)씨의 집. 잠에서 깬 백씨는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대문 안쪽 마당에서 비닐봉투에 담겨 있던 S주조공사 750㎖짜리 P생막걸리 2병을 발견하고 부인 최모(당시 59세)씨에게 "누가 막걸리를 가져다 놨네. 이따 일 나갈 때 가져가소"라며 토방에 올려 놓았다.
같은 날 오전 9시10분. 마을 인근 황전천변에서 잡초제거 희망근로를 하던 최씨는 휴식시간이 되자 아침에 남편이 챙겨준 막걸리 한 병을 따서 같은 동네 주민 정모(당시 68세) 할머니 등 4명과 함께 목을 축였다. 당시 막걸리는 진한 갈색에 역한 냄새까지 났지만 최씨 등은 별다른 의심 없이 1, 2잔씩 나눠 마셨다. 최씨는 막걸리를 마신 직후 구토를 하며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정씨도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최씨 등의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 최씨 등이 마시고 남은 막걸리에서는 청산가리 11.8g이 검출됐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은 이렇게 알려졌지만, 이후 사건은 두 달째 오리무중이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50일이 되던 날, 드디어 범인이 잡혔다. 놀랍게도 백씨와 막내딸(27)이었다. 검찰은 백씨의 막내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이웃 주민 A(51)씨와 막내딸을 대질신문하는 과정에서 막내딸이 A씨에게 최씨 살해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성폭행 혐의로 허위 고소했다는 사실과 함께 "아버지와 공모해 엄마를 독살했다"는 자백까지 받아냈다.
범행 동기도 충격적이었다. 검찰은 백씨 부녀가 15년 전부터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고, 이를 알게 된 최씨와 갈등을 겪어오다 불만을 품고 최씨를 살해했다고 했다. 실제 백씨는 검찰에서 "아내가 없어지면 딸과 부부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최씨를 살해할 마음을 품게 됐다"고 범행사실을 자백했다.
하지만 법정에 선 백씨 부녀가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사건 실체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검찰이 백씨 부녀가 최씨를 살해했다는 자백 외에는 살인과 관련된 직접 증거를 찾지 못한 데다, "검찰이 지능이 떨어진 막내딸에게 자백을 유도했다"는 최씨 유족의 주장까지 나오면서 자백의 신빙성 논란까지 일었다. 백씨 부녀의 자백이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바뀌었고 범행 공모 시기와 살해 방법 모의, 범행실행 경위, 청산가리 포장상태 등에 대해서도 서로 진술이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실제 백씨는 4년 전 이모씨에게서 채소밭 해충구제용으로 청산가리를 얻었다고 진술했지만, 정작 이씨는 1999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1심 재판부도 "범행에 쓸 막걸리를 범행대상인 최씨와 함께 구입(7월 2일)하고, 이틀 뒤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최씨가 발견하기 쉬운 주방 냉장고에 보관하는 등 백씨 부녀의 행동은 살인을 저지르려는 사람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검찰은 백씨 부녀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정황 증거들을 제시했지만 범죄를 증명하기에는 부족했다. 심지어 백씨가 범행에 이용할 750㎖짜리 막걸리를 순천시내 K식당에서 구입했다며 막걸리 제조회사의 막걸리 공급장부 사본을 증거로 냈지만 이 식당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용량인 데다 공급장부 사본마저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백씨가 청산가리 입수시기에 대해 "너무 오래 돼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바꿨지만 검찰은 무슨 이유인지 백씨가 17년 전인 92년에 이씨에게 청산가리를 얻었다고 기소했다. 특히 검찰은 백씨가 막걸리를 사러 자신의 화물차량을 몰고 집에서 K식당까지 간 만큼 이동경로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 화물차량이 찍혀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확인결과 백씨의 차량은 없었다. 결국 재판부는 지난해 2월 "자백의 신빙성이 없고, 백씨 부녀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도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그러나 백씨 부녀가 왜 검찰에서 허위 진술을 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특히 범행 모의에서부터 실행까지 진술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점도 궁금증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해 백씨는 지난 8일 기자와 만나 "당시 검찰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갑자기 아내가 죽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검찰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해서 했다"고 주장했다. 백씨의 변호인도 "검찰이 정신적으로 비정상 상태의 백씨 부녀를 회유해 자백을 끌어냈다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항소심 재판부도 최근엔 백씨 부녀의 정신ㆍ심리상태에 주목, 백씨 부녀에 대한 정신감정결과를 제출하도록 검찰에 요구했다. 백씨 부녀의 부적절한 관계가 최씨를 살해할 정도의 범행동기로 충분한지, 범행 당시 막내딸이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백씨 부녀의 정신감정결과가 그들의 유ㆍ무죄를 좌우할 변수로 떠오른 셈이다.
이에 법무부 치료감호소는 "정신감정결과 현재 막내딸의 정신상태는 장애진단을 내릴 정도는 아니고, 범행 당시도 현재의 정신상태와 큰 차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정신감정기간 중 막내딸이 백씨와의 관계를 부인해 백씨 부녀의 부적절한 관계가 범행동기로 충분한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막내딸의 지능지수(IQ)가 83이내로 도덕적ㆍ윤리적 판단 능력과 사회적 상황에서 인과관계를 예측하는 능력 부족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과연 백씨 부녀의 정신감정결과가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영향을 미칠까. 지금으로선 백씨 부녀의 범행을 증명할 증거는 딱히 없어 보인다. 오락가락하는 백씨 부녀의 자백만 있을 뿐이다. 11월쯤 열릴 항소심 선고공판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광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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