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은 없다/윌리엄 파운드스톤 지음·최정규, 하승아 옮김/동녘사이언스 발행·451쪽·1만8,000원
15달러짜리 계산기를 사려고 한다. 그런데 판매원이 차로 20분 거리인 다른 매장에서 똑같은 계산기를 5달러 싸게 판다고 말해준다면? 대부분은 할인의 기쁨을 누리려고 발걸음을 돌린다. 이들은 계산기 가격이 125달러일 때도 같은 행동을 할까.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칼럼리스트이자 작가인 윌리엄 파운드스톤이 쓴 <가격은 없다> 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계산기 가격이 15달러일 때야 5달러 할인이 크게 다가오지만 125달러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는 게 그 이유다. 숫자는 그 자체로 빈틈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가격으로 쓰일 때는 주변 상황과 기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격은>
기업은 이런 빈틈을 이용해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도록 한다. 심지어 사람들의 소비활동마저도 그때그때 만들어낸다. 책에 소개된 미국 듀크대의 실험을 보자.
두 종류의 맥주가 있다. A맥주는 2.6달러, 할인 품목인 B맥주는 1.8달러다. 품질은 A가 B보다 좋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둘 중 무엇을 사겠냐고 물었다. 3명 중 2명이 A를 택했다. 여기에 1.6달러로 값도 싸고 질도 제일 떨어지는 맥주를 함께 뒀더니 B맥주를 택한 학생 비율이 이전 실험의 33%에서 47%로 늘었다.
이번엔 3.4달러짜리 최고급 맥주를 A, B맥주와 같이 뒀다. 그러자 아무도 B맥주를 사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10%가 최고급 맥주를, 90%가 A맥주를 원했다. 저자는 이처럼 소수가 원하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세 번째 대안을 추가해 소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명품제조회사들의 명품스럽지 않은 판매 전략과도 비슷하다. 이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매겨놓은 상품을 전시해 옆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느끼게 한다. 실제 1930년대 에르메스는 한 시계를 33만달러에 팔았다. 최고위층을 위한 상품이라고 광고했지만 이 시계는 단 두 개만 제작됐다. 애초부터 '위장막'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저자는 인플레이션에 속지 말라고 조언한다. 가령 100달러짜리 물건을 팔 때 공식가격이 149달러인데 109달러로 할인해 주는 거라고 말하는 상인이 있다고 하자. 인플레이션으로 이윤이 점차 줄어들 때도 이들은 공식가격을 올리지 않는다. 대신 할인 폭을 줄이는 눈속임을 쓴다. 소비자는 물가가 상승했는데도 149달러짜리 물건이 여전히 129달러밖에 안 한다는 사실에 홀딱 넘어가 구매를 하게 된다.
책에는 수많은 경제이론과 사례, 모의실험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가격은 집단적인 착각'이란 저자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가격은 없다'란 다소 도발적인 주장마저도 수긍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 모른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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