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대란'은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의 수시 1차 모집 마감일에 예고 없이 터졌다. 가장 많은 지원자가 몰리는 시간이었다. 대학 입학처 관계자들의 피를 말리다가 결국 수시마감을 하루 연기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수시 모집을 앞두고 대학구조개혁위원회의 발표로 입에 담기 싫을 정도의 치명적인 오명을 뒤집어 쓴 대학 입장에서는 마감 날 정전사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 무색한 표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상에서는 어머니가 정전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연로하신 어머니 혼자서! 어머니에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위기 매뉴얼을 익혀둔 어머니는 침착하게 비상벨을 눌러 공포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지만 아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전국을 아수라장으로 몰고 간 정전이 정부와 한전의 전력수급 예측판단 실수로 빚어졌다 하니 어이가 없다. 이건 분명 '미필적 고의의 정전사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국민들에게 '전기를 팔아온' 한국전력이기에 더더욱 화가 난다.
정전 피해자들이 정부의 수요 관리 실패를 법적으로 따지겠다는 목소리가 있어 어머니도 피해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하니 오히려 당신이 먼저 손사래를 쳤다. 불심 깊은 어머니 별호가 '안보살'이다. 그것이 어머니의 자비심인 것을 알고 화를 삭였지만 한전은 평생 전기료 체납 않고 산 내 어머니께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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