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회사들이 단 물이 아닌 쓴 물을 마시고 있다. 급등하는 국제 원당가격과 정부의 가격인상규제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됐던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국내 설탕 제조사은 정부가 최근 내놓은 설탕관세 인하계획에 또 한번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정부는 이달 초 발표한 세제개편안에서 물가안정을 위해 설탕관세를 35%에서 5%로 낮추겠다고 밝힌 상태. 이미 올 상반기 600억원의 적자를 낸 설탕업계는 이 관세 인하안이 관철될 경우, 설탕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설탕 관세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자국 내 제당회사가 있는 대부분 국가에서 매우 높게 매겨지고 있다.
이는 세계 설탕시장이 자국 내에서는 정상 가격으로 유통되지만 수출용으로는 덤핑가격으로 유통되는 이중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 대량으로 원료를 구매해 끊임없이 공장을 돌려야 하는 장치산업의 특성상 각 나라들은 일단 설탕을 대량 생산한 뒤 소비되지 않고 남은 부분은 헐값에 국제 시장에 내다팔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설탕 생산원가는 톤당 600달러지만 수출가격은 400달러밖에 안 된다.
세계 무역시장에 나오는 설탕이 덤핑가격으로 거래되다 보니 국내에 제당업체가 있는 국가들은 자국산업보호를 위해 모두 높은 관세장벽을 두고 있다. 캐나다는 설탕 관세가 35%이지만 반덤핑 과세가 더해져 실질과세가 113%에 달하며 ▦일본 70% ▦EU 85% ▦미국 51% 등 주요국가 관세율이 모두 우리나라보다 높다. 말레이시아는 관세가 0%(무관세)이지만 제당업체에게만 설탕 수입허가권을 주고 있어 덤핑수입이 봉쇄된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설탕관세를 내린다면 국제시장에서 남아 도는 설탕이 덤핑가격으로 대거 국내 수입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설탕값은 낮아질 지 몰라도 제당업체들은 버텨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 사례도 있다.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정부가 생필품 가격안정을 위해 2003년 설탕, 밀가루 등 400개 생필품 가격을 정부가 고시했는데, 이때 정부 고시가격이 국제 가격과 같은 수준으로 책정됐다. 설탕가격이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덤핑가격으로 고시되자 자국 내 제당산업은 붕괴했고, 그 결과 수입 설탕만으로 공급량을 대지 못하자 암시장에서 가격이 7배나 뛰는 극단적 부작용이 빚어지게 됐다.
사실 관세인하 조치가 없어도 이미 제당업계는 사업을 철수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3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과점적 이윤을 만끽했지만 지난해 설탕사업 부문에서 700억원의 적자를 본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600억원 정도 적자를 냈다. 지금 추세라면 하반기에도 300억~400억원의 추가 적자가 확실시된다. 국제 원당 가격이 날로 치솟고 있지만 정부의 압박으로 판매가격은 그만큼 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9년 초 파운드당 10~11센트 수준이던 국제 원당 가격은 올 2월 36센트까지 치솟았다가 현재 28~29센트선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설탕의 국내 소비자가(출고가 기준)는 2009년 초 ㎏당 1,019원이던 것이 현재 1,436원으로 약 41% 오르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CJ제일제당은 설탕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최근 사료용 아미노산 등 바이오산업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고, 모 업체는 설탕부문을 아예 매각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각국의 대체에너지 육성정책도 설탕 값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원당 수출량의 60%를 점유하는 브라질이 대체에너지 선호정책을 펴는 바람에 브라질 사탕수수 재배량의 절반 이상이 바이오에탄올로 소비되고 있어 원당가격이 계속 높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브라질에서 생산될 6억2,600만톤의 사탕수수 중 설탕 생산에 투입되는 것은 2억8,300만톤에 불과하고 나머지 3억4,300만톤이 바이오연료 생산에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원재료가격을 낮추기 위해 국내에서 사탕무를 재배하는 방법까지 연구했으나 대량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토로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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