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도 아닌 9월 중순에 발생한 전례 없는 대규모 정전사태로 전력당국은 수급변화 대응 능력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점을 노출했다. 당국은 "가을철에 갑자기 무더워지는 바람에 수요가 늘어났다"며 날씨를 탓했지만, 이 정도 수요 증가에도 전기를 꺼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넌센스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뿐만 아니라 인위적 순환정전을 실시하면서도 아무런 사전 예고를 하지 않아 시민들의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정전 왜 발생했나
15일 오후 전국적으로 발생한 정전대란은 이상고온에 따른 전력수요 증가와 발전소 점검을 위한 가동 중단에 따른 전력공급 감소가 맞물린 결과다.
한전은 당초 이날 전력 사용량을 6,400만㎾로 예상했지만, 실제 최대 전력사용량은 이보다 321만㎾나 많은 6,721만kW에 달했다. 이는 전날(5,875만kW)보다 1,000만㎾ 가량 증가한 수치다.
한전은 전력예비율이 400만㎾ 이하로 하락하자 자율정전 등 대응에 나섰지만 여전히 예비력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3시쯤부터 전국적으로 30분 단위의 순환정전을 시행했다. 9월 중순 날씨로는 보기 드물게 전국적으로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지는 바람에 냉방수요 등 전력 소비량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마침 공교롭게도 적지 않은 발전소가 발전기 점검을 위해 가동이 중단돼 있었다.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이와 관련, "하절기 전력피크(6월27일~9월9일)가 지난 시점이라 겨울철 전력 수요를 감안해 발전기를 정비하고 있어 전력공급 능력이 줄어든 상태였다"설명했다. 발전기는 원래 1년 12달 풀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20일에서 최대 70일 정도 수리(예방정비)하는데, 상대적으로 전력 수요가 적은 봄ㆍ가을에 점검이 집중된다는 것. 이날 예방정비에 들어간 발전용량은 대략 830만㎾였다. 이는 전체 발전 용량의 11%에 해당하는 수준.
염 이사장은 "오늘 최대 수요인 6,721만㎾는 절대용량으로 보면 큰 수준은 아니었다"면서 "하지만 830만㎾ 이상이 점검 중이라 전력공급이 어려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안이한 예측, 늑장 대응
하지만 정전의 원인을 늦더위와 불가피한 발전기 점검 탓으로만 돌리는 건 책임회피성 해명이란 비판이 많다. 이미 전날부터 전국 곳곳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지는 등 전력수요 급증이 어느 정도는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는 사전에 9월 중순까지 더위가 지속될 것이란 기상예보가 나왔던 만큼 계획예방정비 대상 발전기의 수를 탄력적으로 조정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돌발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날 정전으로 피해를 본 한 산업단지 관계자는 "날씨라는 게 원래 예측하기 힘든 것이고 늦더위는 물론이고 늦추위도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때마다 예고 없이 단전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냐"고 반문했다.
순환정전(단전)을 실시하면서 아무런 고지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자체 발전능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 공장들이 가동되지 못하는가 하면 엘리베이터 작동이 멈추고 신호등이 고장 나는 등 갑작스레 크고 작은 사고와 혼란이 발생하는 상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한전 측은 "순환정전 실시 1시간 전에라도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지역마다 전력상황이 다른데다 전력소비량 역시 매 순간 변하는 만큼 전력 예비율을 감안해 이를 미리 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전의 설명에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려대 전기공학부의 한 교수는 "전력 소비량이 오후 2~4시 사이에 최고치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순환정전 실시 여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전은 SK텔레콤 등 이동통신사에는 3시부터 순환정전을 실시할 것임을 사전에 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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