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안개 속에서 사슴 한 마리가 차에 치이고, 한 어린 아이는 작심한 듯 열차 선로 위에 서 있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영화는 두 죽음이 교차하는 서두를 통해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를 암시한다.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죄책감조차 동반하지 않는 로드 킬 같은 죽음이 우리의 현실 앞에 놓여있다고.
'도가니'는 옳지 않은 현실에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영화다. 신랄하지만 자극적이지 않다. 어떠한 영화적 기교도 배제한 채 차분한 시선으로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한다. 정통파 투수가 묵직한 직구로만 승부하듯 화면은 정직하다. 청각장애학교 아이들이 손이 묶인 채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교사로부터 발길질과 주먹세례를 받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차분한 화법이기에 되레 영화 속 장면들은 마음에 곧바로 꽂히며 탄식과 분노의 눈물을 부른다.
공지영의 동명소설을 밑그림 삼은 이 영화는 무진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부조리를 헤집는다. 청각장애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학대와 성폭행, 그리고 이를 고발하려는 이와 무마하려는 자들의 격한 줄다리기를 통해 부조리한 이 사회에 직격탄을 날린다.
영화는 주인공 강인호(공유)를 통해 현실 고발과 순응 앞에서 서성이는 이 시대 소시민의 현주소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여러 미덕 중 하나다. 어렵게 교사 자리를 얻은 뒤 학교 재단측의 부당한 '발전기금' 요구에 반발조차 못하는 인호의 무기력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옳은 일, 옳은 소리만 하고는 못사는 법"이라는, 인호를 향한 모친의 충고는 교과서대로 살다가는 설 자리를 잃고 마는 현실에 대한 역설적 비판이다.
복지재단의 비리, 경찰의 뇌물 수수, 법원의 전관예우 관행 등을 불러내며 복마전 같은 이 시대를 고발하기도 한다. 영화는 혈연, 학연, 지연이 돈을 매개로 뭉치고 다져져 형성된 불의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지점도 놓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아이들을 유린하고도 교회 장로임을 결백의 증거로 내세우는 교장, 그를 싸고 도는 교인들의 행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반 명확한 선악 구분으로 긴장감이 떨어지지만, 법정공방이 이어지는 후반부는 손에 땀을 부른다. 좋은 법정영화가 그렇듯 잘 짜인 서스펜스를 품고 있다. 과연 인호와 피해 아이들이 단죄에 성공할 수 있을까. 결말은 안개 가득한 가상의 도시 이름 '무진'에 담겨 있다. '마이 파더'(2007)로 데뷔한 황동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 22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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