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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최동원과 장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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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최동원과 장효조

입력
2011.09.1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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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에서 져주기(승부조작)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골랐다. 투수만 놓고 봐도 쌍포 김시진(19승)과 김일융(16승)이 버티고 있는 삼성이 개관적 전력에서 절대우위였다. 물론 롯데에도 27승을 올린 최동원이 있었지만, 혼자서 마운드를 다 책임질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최동원은'기적'을 만들었다. 묵직하고 빠른 직구와 '폭포수'로 불리는 낙차 큰 커브로 5경기에 나와 4승을 따내는 한국프로야구 전대미문의 기록으로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 승리도 승리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투구였다. 그는 네 번 완투했고, 한번은 5회 구원투수로 열흘 동안 40이닝을 던졌다. 정말 로봇이나 가능한 일.'무쇠 팔'이라는 수식어는 당연했다. 식을 줄 모르던 '무쇠 팔'은 1987년 5월 당대 쌍웅이 맞붙은 해태와의 경기에서 또 한번 명승부의 역사를 만들었다. 연장 15회, 4시간 56분 동안의 사투. 둘은 441개(최동원 209개, 선동열 232개)의 볼을 던지고도 2-2로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금테 안경을 코 위로 한번 쓱 밀어 올리고는 시원하게 공을 뿌려대던 자신감과 뚝심의 최동원.

■ 그러나 그의 야구인생은 너무 짧았고, 불운하였으며, 외로웠다. 구단과의 연봉마찰과 그에 따른 온갖 오해, 선수회 창립문제로 그는 1988년 롯데에서 쫓겨나 삼성으로 가야 했다. 고향을 잃은 그에게 '무쇠 팔'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을까, 3년 뒤에 그는 쓸쓸히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한 번 찍힌 낙인으로 그는 지도자로서도 고향에 갈 수 없었다. 1984년 가을의 전설을 잊지 못하는 부산 팬들의 마음을 롯데는 끝내 외면했다. 그 한(恨)이 쌓여서일까. 그 불꽃같았던'무쇠 팔'을'역사'로만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빠른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 1주일 먼저 55세로 세상을 떠난 '타격의 달인' 장효조도 그랬다.'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고 할 정도였던 최고의 교타자(巧打者)도 1989년 연봉 마찰로 삼성을 떠났고, 3년 뒤 롯데에서 현역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나마 최동원과 달리 10년 만에 지도자로 돌아왔지만, 마음껏 재능을 펼칠 기회를 놓쳐버렸다.'고향'(지역연고제)과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다 쫓겨난'영웅들'이 있었기에 프로야구 관중 600만 시대도 열린 것이리라. 그들을 따듯하게 품어야 한다. 그게 고향이 아닌가.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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