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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희망버스 기획한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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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희망버스 기획한 송경동 시인

입력
2011.09.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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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사회 구조가 삶을 가로막는다면 맞서 저항하고 괴로워하는게 시인 정신"

그는 시인인가? 물론. 한국 시단의 양대 종가인 창비에서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2009)을 냈고 지난해엔 천상병문학상, 올해는 신동엽창작상까지 받았으니. 그는 시위꾼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를 시작으로 기륭전자, 콜트 콜텍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농성 현장과 용산 참사의 남일당, 홍익대 두리반 등 철거 현장까지 2000년대 굵직한 분규 현장을 제 집인 양 누볐으니까.

그러니 당국의 눈엔 '시인의 탈을 쓴 전문 시위꾼'으로 불리는 이, 지금은 희망버스 기획자로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수배자다. 그러나 반대편에선 사회 모순의 현장에 몸을 던지는 '거리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송경동(44) 시인이다.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우리 사회 근본적 대립점에서 나오는, 일치하기 힘든 시선일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가 기획하고 물꼬를 튼 희망버스가 실정법이란 좁은 잣대로는 재단하기 어려운, 큰 변화의 물결을 여는 기폭제가 됐다는 점이다. 6월 11일 처음 16대(700여명)로 출발했던 희망 버스 차량은 동원하는 주체도 뚜렷하지 않았고 승객들도 제 각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어났다. 4차까지의 참여자는 모두 1만 5,000여명. 승객들이 만나고자 했던 이는 대중연예인도 권력자도 재벌도 아닌, 지상 35m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중인 초로의 여성이었다. 그가 이어주었던 승객과 농성자간 실타래는 '우리도 어쩌면 저 고공 위의 위태로운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공유된 위기의식이었는지 모른다. 희망을 주문한 그의 바람처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라는 한 사업장에서 벌어진 정리해고 반대 농성은 뜻하지 않는 바람을 몰고 왔다. 다들 몸살을 앓는 일이건만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노동 의제와 사회 연대의 정신을 불현듯 일깨우는, 새벽의 타종 소리처럼. 그 역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지난 5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희망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다친 발목은 괜찮습니까?(지난해 10월 그는 포크레인 위에서 보름 정도 농성하다 떨어져 발꿈치 뼈가 산산조각 나는 큰 부상을 입었다.)

"2차 희망버스 때까지도 목발 짚고 내려갔어요. 사실 지금도 좋은 상태는 아니에요. 핀이 14개 박혀 있어요. 사고 난 뒤 병원에서 두 달, 집에서 석 달 가량 요양했는데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안타까운 소식만 들렸어요. 구미의 한 업체에서 한 분이 분신하고,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공장 점거하다 또 한 분이 분신하고…, 해 넘어 가서는 김진숙 선배가 한진중공업 절망의 85호 크레인에 혼자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그 무렵 쌍용차 정리해고자 가족에서 열네 번째로 목숨을 잃은 이가 나오고.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노동자들의 절망적 상황이 이렇게 표현되는구나 싶었어요. 다리가 나으면 맨 먼저 찾아 가야겠다 싶었던 곳이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이었죠."

-희망버스는 어떻게 기획하게 된 것인가요?

"다리가 좀 나아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농성장을 찾아 다녔어요. 저는 이상하게 그런 곳이 편하게 느껴져요. 콜트 콜텍 노동자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문화제를 하던 낙원상가 앞, 재능교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300일 넘게 싸움중인 시청 앞 농성장, 쌍용차 정리 해고자들과 문화예술인이 매주 여는 보신각 앞 촛불집회…. 그런데 모두들 어깨가 처져 있었어요. 답이 안 보이니까. 여기서 희망마저 없다면 죽어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아요? 힘들더라도 희망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어요. 희망은 사람들간의 연대를 경험할 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맨 먼저 제안했던 게 그분들이었어요. 길거리에서 절망하고 있는 그분들께 우리가 먼저 연대를 하자, 고공 농성중인 부산의 김진숙씨를 찾아가 보자고. 힘든 사람이 힘든 사람 속을 안다고. 그분들과 얘기했던 것을 사회적인 질문을 던지는 차원에서 각 단체에 공개적으로 제안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6월 11일 처음 16대로 출발하게 된 거죠."

-희망버스의 확산 과정이 놀라웠습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나요?

"처음부터 이렇게 지속되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죠. 1차 때 가서 그 아픔을 보고 나올 때 해고자 가족들이 '당신들을 통해 희망을 보았습니다'는 문구가 적힌 양말을 선물로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분들이 우시고, 우리도 울면서 눈물바다가 됐죠. 갔다 온 사람들이 바로 올라와서는 '다시 가자. 한번 갔다고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2차 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어떻게 해야 힘이 될까. 2차로 잡은 7월 9일이 마침 고공농성 185일째 되는 날이었는데, 185대가 가자는 터무니 없는 제안을 했어요. 아무 밑천도 없으면서 겁도 없이. 그런데 정말 놀랍게 희망버스가 전국 각계각층에서 솟아나오는 거예요. 반값 등록금 투쟁을 하던 이들은'반값 등록금 버스'를 만들겠다, 장애인들은 장애인 버스를, 농민들은 농민버스를, 그런 식으로 의료인 버스, 출판인 버스, 대안학교 버스, 인권 버스 하는 식으로 전 사회적으로 각 부문들이 연대의 버스를 만들어준 거예요. 한 사업장의 한 여성 노동자를 위해서,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황금 휴일에 자기 돈을 내서 찾아가겠다는 운동이 벌어진 거예요. 전세계적으로도 이런 일은 흔치 않아요. 그런 경이로운 일이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거죠."

-이 희망버스의 배후(?)라고 할 수 있는 희망버스 기획단은 어떻게 구성됐나요?

"지금까지 희망버스에 탑승한 1만 5,000여명이 다 희망버스 기획단이죠."

-아니, 실제 실무자들이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

"딱히 실무자들이 있는 게 아니에요. 기획단 사무실도 없어요. 저는 수배상태니까 민주노총 사무실에 빌붙어 지내는 거고. 각 분야별로 탑승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가자고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고 실행하는 운동인 거예요. 참가하는 사람들도 차수마다 다 다르고요. 처음에 참가 신청을 받을 곳이 없어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라는 사회단체의 인터넷 카페를 빌렸는데, 그 카페를 통해 얘기를 나누긴 하죠. 무슨 중앙기획단 몇 명이 있어서 뒤에서 조직하는 게 아니에요. IMF 이후 십 수년 동안 자행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라는 '사회적 광우병'이 사람들을 모은 거죠. 그게 배후라면 배후죠."

-희망버스를 두고서 진보 진영에서도 비판적 시각이 있습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구호가 아닌가요?

"15년 전만 한번 봐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한국 사회에 이식되기 전, 그 때도 산업구조상 불안정한 노동 형태가 있긴 했지만, 정규직 일자리 중심의 노동 사회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비정규직 900만명 시대입니다. 6개월짜리, 12개월짜리, 길어야 2년의 일자리, 임금은 과거에 비해 거의 반 토막 나 있고. 십수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어요. 그 때의 한국 사회가 그럼 사회주의였나요? 정리해고나 비정규직화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신화예요. 지금 재벌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 자본이 800조원이 된다고 해요. 이것을 조금만 나누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예요."

-이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노동운동가나 정책 담당자의 몫이 아닐까요. 시인으로서 이 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이 역시 시인의 길이라 생각해요. 시인은 시대의 상상력을 느끼고 얘기하는 사람이잖아요. 이 시대 사람은 어떤 꿈을 꾸는지 알려면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야죠. 시인들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런 곳에 시대적 열망이 내재해 있다고 봐요. 외국의 문학인을 봐요. 예컨대 한국 청소년들이 깜빡 죽는 네루다 시인도 칠레 공산당원이었죠. 네루다가 돌아다닌 곳은 짐꾼 노조, 탄광 노조 같은 곳이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시를 읊은 사람이에요. 푸시킨은요? 차르 체제에 맞서서 농민군 편에 섰던 혁명 시인이었어요. 헤밍웨이는, 조지 오웰은요? 이들도 젊었을 때 스페인 내전에 총 들고 참전했어요. 좋은 카페에서 폼 잡고 앉아서 사랑타령이나 하는 게 시인이 아니라고요. 시인들은 그 시대 모순의 극점에 가 있는 거죠. 잘못된 관습이나 사회 구조가 더 나은 삶을 가로막는다면, 거기에 맞서 저항하고 괴로워하는 게 시인의 정신이고 문학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해요."

-여러 분규 현장을 누볐는데 구속된 적은 없었죠?

"제가 무슨 '시적 허용'을 받는지 (잡혀 가도) 이상하게 잘 나왔어요. 문정현 신부님이 농담 삼아 그래요, '너 무슨 숨겨놓은 빽 있냐'고.(웃음)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된 게 세 번이었어요. 판사들이 봐도 죄가 돼야 말이죠. 저는 죄가 좀 됐으면 싶은데….(웃음)"

-사회적 약자의 농성장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요?

"거기엔 어떤 해방감이 있어요. 경찰이나 용역 깡패의 침탈을 대비하면서 무척 긴장돼 있고,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로 무겁긴 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노예적 삶이 아닌 거예요. 의지와 낙관, 용기도 함께 있고 연대하는 사람들도 모여 있으니까, 잠깐의 해방구 같은 곳이기도 한 거죠."

-그 투쟁 현장은 그 해방감이나 자아를 극단적으로 과장시키는 곳은 아닌가요. 노동 현장에서 나오는 시가 보편적 공감을 줄 수 있지만, 투쟁 현장의 시는 보편성과 멀어질 우려가 있지 않나요?

"제가 처음 시를 쓸 때는 20대 때 노동자로 살면서 느꼈던 이야기와 정서를 구체적으로 담았어요. 그 때는 '노동해방 문학' 이란 게 주를 이루던 시절로, 저는 오히려 박노해의 초기 시 같은 현장 노동자의 일상과 애환을 다루려고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투쟁시란 게 아예 사라져버려서 저라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 시가 생경하고 과장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시들은 현장의 필요 때문에 나오는 게 많은데, 현장 사람들과 공감하는 게 우선이에요. 이게 낭송시의 장단점이긴 하죠. 제가 기뻤던 것은 뉴코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시를 낭송한 적이 있었는데, 일년 반이 지나서 어떤 아주머니가 그 시가 적힌 수첩을 보여주는 거예요. 힘들 때마다 그 시를 봤대요. 제 시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 되는 시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현장시가 다 그런 것(생경하고 과장된 것)은 아니고, 제가 시를 못 쓰는 것일 수도 있죠. 오히려 좋은 시들은 현장에서 읽혀졌던 시들이니까. 앞으로는 그런 걸 찾아가야 되겠죠."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인가 노동 운동인가. 무엇이 우선인가요?

"동시에 가는 것 같아요. 전 도회지 뒷골목에서 건달로도 살아보고 건설 일용 노동자로도 살아보면서 제 마음 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어요. 뭔가 토해 놓고 소통해 보고 싶은 거리들이 생기면서 문학으로 표현하고 싶어진 거고, 또 그 생활 속에서 사회적 모순을 느끼면서 비루한 삶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구도 생긴 거죠. 삶과 문학이 저한테 하나로 맞물린 거예요."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유상호기자 shy@hk.co.kr

■ 송경동 시인은

전남 순천시 벌교 출신인 송경동 시인의 젊은 시절은 비루했다. 가난한 집안 살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시절엔 말더듬이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고, 고등학교 때는 공부는 뒷전이고 디스코텍을 드나들던 문제아였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3만원의 '삥'을 뜯다 잡혀 소년원 신세를 졌고, 그 뒤엔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뒷골목 유흥 업소를 전전했다.

서울에서 1년여의 허황한 삶을 뒤로 하고 노동자로 들어선 그는 목수나 용접ㆍ배관공으로 일거리를 찾아 여천 석유화학단지, 서산 간척지 사업장 등을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2,000만원 정도의 돈을 모았으나, 늦은 밤 취객을 치는 교통사고를 내 모은 돈을 모두 날렸다. "소년원 출신이라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그저 돈 좀 모아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게 꿈이었어요. 잔업 철야하며 뼈 빠지게 모은 돈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지니까, 너무 허탈한 거죠. 내가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그 땐 무엇보다 나 스스로 위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문학을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 시절에 유일하게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던 게, 시를 잘 쓴다는 얘기였거든요."

그 무렵인 1991년 우연히 신문에서 문학강좌 광고를 보고 신청한 것이 그가 문학에 들어선 계기였다. 문학을 배우기 위해 다시 상경한 그는 지하철 건설 현장을 누비며 생계를 잇는 한편, 구로 노동자 문학회에서 습작 과정을 거쳤다. 1997년에는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등과 함께 생활문예지인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며 출판 문예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고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첫 시집 (삶이보이는창 발행)을 냈고, 2009년 두번째 시집 (창비)을 발간했다. 그는 "내가 살아온, 어쩌면 불우하고 비루할 수 있는 삶이 지금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며 "문학이 내 삶과 잘 만난 것 같아서,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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