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흙을 바른 장정 10여명이 비트 강한 음악에 맞춰 무대 중앙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들이 한 손에 쥔 긴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음향. 주인공인 무사 케이(박해수)와 도적떼는 치밀하게 계산된 호흡에 따라 때로 느린 동작과 정지 동작을 이어간다.
막이 오르고 20여분쯤 흘렀을까. 마치 무대 위에 펼쳐진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이들의 결투 장면으로 '검객괴담'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부제를 단 연극 '됴화만발'의 정체가 확실히 드러난다. 일본 작가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1947)를 재창작한 극작가 겸 연출가 조광화씨의 신작 연극은 이렇게 서사보다는 스타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벚꽃을 두려워하는 산적이 여인에게 도취돼 자신을 잃어가는 원작은 영생불멸의 운명을 짊어지고 고대 진시황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복숭아꽃 만발한 숲에서 2,000년 넘는 세월을 홀로 견뎌 온 검객 케이의 이야기로 치환됐다. 단이(장희정)의 치명적 매력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진 케이는 살인을 일삼는다. 연극은 영생의 모티프를 추가해 존재의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고자 한다.
언뜻 난해해 보이는 내용을 무협 활극에 코믹을 가미한 대중문화 코드로 풀어간 연극은 여러모로 시대극에 MTV적인 요소를 더한 일본 영화 '사무라이 픽션'(1998)을 연상시킨다. 등장인물은 개성이 넘치고 뮤지컬 못지않게 음악과 안무에 공을 들인 무대는 역동적이며 현대적이다. 휴식 없는 120분의 공연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다. 쉬운 줄거리에 유명 연예인을 앞세운 상업연극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형식의 오락연극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준 셈이다.
다만 현란한 무대 화법에 주제의식이 묻힌 듯한 점이 아쉽다. 형식의 현대성과 달리 내용면에서는 캐릭터의 성 역할이 고정된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은 보완되면 좋겠다. 25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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