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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허실생백(虛室生白)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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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허실생백(虛室生白)의 바다

입력
2011.09.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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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내내 북태평양에서 생의 가장 참담한 추석을 맞이하고 있는 친구 오어(吾魚) 선장의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친구는 '기상 탓으로 전화가 끊겼다'는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동안 위성통화와 메일을 통해서는 조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러시아입역 행정적인 처리가 잘못되어 한국 배 전부가 한 달 이상 조업을 못하고 발이 묶여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시원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지난 안부가 불안한 은유인 것을 시인인 제가 읽지 못했나 봅니다. 선장 친구의 걱정은 '일본 방사능 영향으로 잡아놓은 고기마저 팔리지 않아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한 회사는 부도의 위험에 몰렸다'로 이어졌습니다.

바다보다 깊은 근심을 먼 육지의 저에게 털어놓으며 '아마도 내년은 바다로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선장 폐업을 선언했습니다. '평생 바다를 떠돌며 살아온 삶을 육지로 옮겨 새롭게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마지막 인사가 큰 파도처럼 저를 덮쳤습니다. 출항 전에 저는 친구에게 허백당(虛白堂)이란 당호를 선물했습니다.

허실생백(虛室生白)에서 온 그 말은 방을 비우면 빛이 그 틈새로 들어와 환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친구의 바다가 그 당호처럼 근심을 비운 무념무상의 바다이길 바랄 뿐입니다. 지금 한국국적 꽁치 잡이 원양어선들이 좌표를 잃고 추운 바다를 떠돌고 있는 것을 정부는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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