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본주의 4.0'이 유행이다. 자본주의에 4.0이라는 숫자가 곁들여있어 뭔지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알고 보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대처 정부, 미국의 레이건 정부 이후 풍미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3.0'으로 명명하고, 이 시장만능주의가 2008년 금융위기로 사실상 붕괴하자, 그 대안을 찾자는 취지에서 '자본주의 4.0'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4.0'이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한 인물은 러시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저널리스트 아나톨 칼레츠키다. 그는 2010년 출간한 (Capitalism 4.0: The Birth of a New Economy)에서 18세기에서 1920년대까지 지속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1.0으로, 이후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정부의 시장개입이 대세가 됐던 시기를 2.0으로 규정했다. '자본주의 2.0'이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휘청거리게 되자, 비효율적인 정부 대신 시장에 모두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가 태동했는데 이 시기가 '자본주의 3.0'이라는 것이다.
'4.0'은 따뜻한 자본주의?
일부 보수언론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4.0' 논의는 '따뜻한 자본주의' '착한 자본주의'로 귀결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공생발전'을 강조하면서 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따뜻한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충 자본가의 선의, 이를 바탕으로 한 공정한 사회, 그리고 번영하는 국가를 지향하는 것 같다. 좋은 말이다. 워렌 버핏처럼 부자들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대기업들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일감도 주고, 자금도 지원하는 자본주의…. 참으로 이상적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이다. '아흔아홉 섬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한테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이게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혈연의 의미가 남달라 어떻게든 기업과 부를 2대, 3대에 세습해주고 싶어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은퇴할 때 자녀의 승계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미국에서도 자본가의 선의를 전제로 한 체제개혁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노트나 볼펜 등 소모품 조달회사까지 자녀에게 주는 우리 풍토에서 '따뜻한 자본주의'는 공허하게 들린다.
적합성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미 우리 경제는 대외개방체제에 편입된 지 오래고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들과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만약 삼성이 수조 원을 버니까 한 2조원만 복지재정으로 내놓으라고 해보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겠지만, 경쟁사인 애플이나 구글도 미소 지을 것이다.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은 대부분의 제품 생산을 외국에서 해 미국 내 고용은 삼성전자의 3분의 1인 2만 명을 조금 웃돌 뿐이다. 최대 이익을 내는데 초점을 맞춘 주주 중심의 경영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업과 싸워야 하는 삼성이 수익의 상당 부분을 재투자나 연구에 투입하지 않고 '따뜻한 자본주의'를 위해 내놓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경쟁력 약화로 돌아올 수도 있다.
자본가 선의 요구는 비현실적
그런 따뜻한 역할은 정부가 맡아서 제도나 법으로 해야 한다. 담합, 납품가 후려치기 등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법대로 제어하고, 세금 60억 원으로 수백조 원의 그룹을 승계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제대로 걷은 세금 등으로 재정을 확보해 경쟁에서 낙오된 계층을 감싸 안는 것은 정부의 일이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나 우리의 저축은행 사태에서 드러난 금융의 무절제함 등 시장의 오류도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 4.0'은 정부와 시장의 역할 조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본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개혁은 현실성도, 적합성도 없다. 삼성이 할 일, 정부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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