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워싱턴 백악관 오벌 오피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인 이곳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고개를 떨군 채 손만 만지작거렸고 고개를 돌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날 양국 정상은 중동 평화협상 재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지만 분위기는 줄곧 냉랭했다.
"1967년(3차 중동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에 네타냐후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 구상은) 환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맞받았다. 오랜 혈맹 관계인 양국 정상이 면전에서 얼굴을 붉힌 셈이다. 그럴 만한 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말은 67년 6월'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에 돌려주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초 중동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에 '2개 국가 원칙'을 수용하라고 하는 등 이스라엘의 양보를 강조했는데 이 때문에 양국 관계는 껄끄러웠다. 이전 대통령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친이스라엘 성향의 중동 정책에 근본적 변화가 오는 것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랬던 미국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추진 중인 유엔의 독립 국가 승인을 앞장서 막고 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13일 열리는 제66회 유엔 총회에 독립국가 승인 신청서를 정식 제출할 예정이다. 팔레스타인은 앞서 6월 독립국 승인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겠다고 선언했었다.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해 왔지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유엔에서 독립 국가로 승인 받으면, 이스라엘은 67년 이후 팔레스타인인을 내쫓고 확보한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등 현 영토의 3분의 1에 대한 점유권을 위협받게 된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승인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며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다. 빅토리아 눌런드 국무부 대변인은 8일 "(독립국 승인 문제를)유엔 안보리에서 표결한다면 미국은 거부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어 "최선의 길은 (이ㆍ팔 양국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스라엘 총리 앞에서 과거엔 상상할 수도 없는 민감한 영토 문제까지 언급했던 미국이 입장을 바꾼 것일까. 오바마 대통령의 '67년 국경선' 발언이 논란이 된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면 미국의 속내를 조금은 엿볼 수 있다. '67년 국경선' 발언 논란이 불거진 사흘 뒤인 5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ㆍ이 공공문제위원회(AIPAC) 총회에서 "'67년 국경선' 발언은 다른 국경을 설정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협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미국 정ㆍ재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친이스라엘 로비단체인 AIPAC 앞에서 한 발 물러난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유대계로부터 8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얻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내년 대선 승리를 위해 유대계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높은 실업률과 재정위기 등 국내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바마 정부에게 중동 문제까지 겹치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사실 어느 쪽을 택해도 부담이다. 미국의 고위 당국자는 앞서 4일 뉴욕타임스에 "거부권을 던지면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에서 엄청난 분노가 일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이스라엘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해야 한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팔레스타인은 그러나 유엔 독립 국가 가입을 강행할 태세다. 마무드 압바스 PA 대변인은 9일 "유엔 총회에 194번째 회원국 승인을 공식 요청할 방침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공무원과 활동가 등 100여명도 이날 임시정부가 있는 라말라에 모여 "우리의 정체성과 국가를 원한다"며 요르단강 서안의 유엔 본부까지 행진한 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가입 지지를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팔레스타인은 미국의 반대로 완전한 독립국 지위 획득이 사실상 어려운 점을 감안, 사실상의 국가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유엔 안보리 15개국 가운데 9개국 이상이 승인하고 총회(193개국)에서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으면 '표결권 없는 옵서버 실체(entity)'에서 '표결권 없는 옵서버 국가(state)'로 승격된다. 이 경우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국가로 인정받는데다 수십 개의 유엔 단체 회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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