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가까이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박근혜 대세론'이 '안철수 신드롬'의 등장으로 흔들리면서 역대 선거에서 결승점 코앞까지 대세론을 형성했다가 소멸한 사례들이 새삼 주목 받고 있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대선에서 모두 대세론의 중심에 있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 전 대표는 97년 당시 신한국당 경선 직후까지만 해도 최대 57.7%의 지지율을 보이면서 고공 행진을 이어갔지만, 두 아들의 병역 문제에 이어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를 이룬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
이 전 대표는 98년 8월 정치 일선에 복귀한 뒤 다시 2002년 대선 몇 개월까지 대세론을 형성했지만 결국 노무현ㆍ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벽을 넘지 못했다.
2002년 여권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다. 98년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의 합당 뒤 대세론이 형성됐다. 2002년 3월 국민 경선 개시 전까지만 해도 당 대선주자 중 단연 1위를 달렸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노무현 돌풍에 밀려 경선 완주도 하지 못했다.
대세론까진 아니지만 박찬종 전 의원과 고건 전 총리도 여론조사 1위의 추억을 갖고 있다. 박 전 의원은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해 낙선한 뒤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1997년 봄까지 대선주자 지지도 1위를 기록했지만 당내 경선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 등에게 밀려 중도 하차했다. 고 전 총리도 2004년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30% 전후의 대선주자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선두권을 형성했지만 이후 지지율 하락 등으로 2007년 1월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리서치앤리서치 배종찬 본부장은 8일 "박근혜 전 대표는 이회창 전 대표에 비해 지지층의 폭이 넓은 데다 안철수 원장 지지층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층보다 결집력이 떨어져 과거에 좌절한 대세론과는 차이가 있다"면서도 "다만 당내에서 대체 인물 필요성이 부각되면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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