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과정에서 거품은 생기게 마련이다. 연 매출 100억 원의 탄탄한 중소기업이 있다 치자. 주변에선 사업 확장을 권하고, 은행에선 서로 돈을 대주겠다고 나선다. 마침내 돈을 빌려 여기 저기 신사업에 진출해 덩치를 키우지만, 대개는 급작스레 불어난 덩치를 감당할 만큼 수익을 거두기 쉽지 않다. 결국 덩치는 커졌지만 속으론 일시적이라도 빚이라는 거품이 잔뜩 낀 허약체질이 된다. 기업의 덩치가 커질 땐 은행이나 가계에도 거품이 생긴다. 경제가 호황이면 은행은 대출을 늘리고, 가계는 집을 넓히고 씀씀이가 커지면서 거품이 끼기 때문이다.
■ 거품은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다. 갚기만 하면 부채는 자본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황이나 행운이 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경제엔 필연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거품이 반복적으로 쌓이게 된다. 문제는 이 거품을 어떻게 제거하느냐다. 과거 우리나라는 거품을 매우 과격하게 제거했다. 그 방식은 이랬다. 일단 기업들이 맘껏 덩치를 키우도록 내버려 둔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업 확장에 성공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이 갈린다. 실패한 기업들이 많아져 국가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한 번에 그런 기업을 정리하는 방식이다.
■ '부실기업 정리'가 바로 그런 조치였다. 군사작전처럼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어떤 기업이 부실인지 아닌지는 정부가 결정했다. 파산의 생살부(生殺簿)였다. 해당 기업은 강제로 동일 업종의 다른 기업에 흡수되거나 매각되고, 은행은 이 과정에서 부실채권을 털게 되어 어쨌든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1972년의 '8ㆍ3조치', 79년 '중화학 투자조정조치', 80년 '9ㆍ27 기업체질 강화조치' 등이 대표적이다. 이면에선 수많은 기업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정부로선 단숨에 거품을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 이 방식을 선호한 게 사실이다.
■ 요즘엔 강제 부실기업 정리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젠 부실 여부를 정부가 결정할 수도 없고, 억울한 피해가 생기는 것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가계대출 억제책을 보면 정부가 부실기업 정리 식의 '부실가계 정리'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경 일변도다. 획일적 총량규제로 가계대출 전면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빚은 데 이어, 대출금리 인상과 만기연장 억제 등 정책편의만 생각한 조치들이 그런 느낌을 준다. 가계는 부실하다고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강경책보단 섬세하고 끈질기게 가계를 살리는 방안이 아쉽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