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직전 군인들이 민간인 80여명을 집단학살한 ‘문경 학살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 줘야 마땅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국가가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고도,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완성’ 등의 이유를 들어 배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부당한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8일 문경학살사건 피해자의 유족인 채모(73)씨 등 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949년 12월 24일 무장공비 토벌에 나선 육군 2개 소대 병력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을 찾아 ‘공산주의자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마을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던 마을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86명이 희생됐고, 이들 중 70%는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군은 그러나 ‘무장공비에 의한 최후의 만행’이라고 공식 발표했고, 사건의 진상은 2007년 6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한 데 분노한 군이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학살한 것”이라고 결정하기까지 수십년간 묻혀 버렸다.
진실이 밝혀지자 2008년 7월, 채씨 등은 국가를 상대로 “10억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1ㆍ2심 재판부는 “손해배상 청구권은 사건 발생 5년 후인 1954년 12월에 시효가 소멸됐다”며 “또 1960년 국회 차원의 진상 조사가 이뤄진 적이 있고 2000년 3월 원고들이 헌법소원도 청구했다는 점에서, 불법행위 인지시점 기준으로 봐도 시효(3년)가 이미 지났다”고 기각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