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퇴장은 긴 여운을 남긴다. 최근 애플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스티브 잡스가 그러하다. 그가 촉발시킨 혁신의 대소용돌이로 인해 한국 정보기술(IT) 기업을 포함한 수 많은 업체들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잡스에게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크게 두 가지다. 지난 10여 년간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획기적인 제품들을 잇따라 내놓으면서도 그는 한 번도 시장조사를 하지 않았다. 동네 구멍가게를 내려 해도 수요 조사를 하는 게 21세기 비즈니스의 기본인데, 잡스는 이런 상식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 터무니 없는 자신감, 자신의 직관에 대한 무한대에 가까운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1976년 21세의 나이로 애플을 창업한 뒤 성공과 실패를 오간 35년 간의 드라마틱한 삶 속에서 한 순간도 쉼 없이 창조의 열정을 발휘해 온 점도 놀랍다.
이런 삶의 동력,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해답의 상당 부분은 2005년 그가 했던 스탠포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입양과 대학 중퇴, 암투병 등을 겪으며 터득한 깨달음을 담은 이 연설에서 그는 "죽음은 새 것이 옛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라며"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라""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양아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써야 했던 가난한 부모의 노력에 비해 별 의미가 없다고 느낀 대학 생활을 6개월 만에 접었을 당시에 대해서도 회고했다. "친구 방의 바닥에서 잠을 잤고, 하나에 5센트 하는 빈 콜라병을 모아 음식을 사먹고,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공짜로 밥을 주는'하레 크리슈나(힌두교)사원'에 가기 위해 7마일(약 11㎞)을 걷곤 했다."
물론 그가 힌두교 사원에서 채운 것은 육신의 허기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법도 배웠음에 틀림 없다. 그의 연설이 "늘 갈망하라,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충고로 마무리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목표로 개인용 컴퓨터(매킨토시)를 처음 만들었고,'세상을 바꾸는 완벽한 제품'을 늘 갈망해 온 그는 자신의 비전 실현에 누구보다 큰 허기와 공복감을 느꼈던, 철두철미한 '헝그리 정신'의 소유자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잡스가 일으킨 IT 빅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끝이 어떠할 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삼성과 함께 한국 전자산업의 양대 축을 이루는 LG가 1959년 창사(당시 금성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쇼크에 제 때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이 부문 5분기 연속 적자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한 구글이 내년 상반기 전열을 재정비할 때까지 결정적인 스마트폰 제품을 내놓지 못한다면 제2의 모토로라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2007년 감각적인 초콜릿폰, 아이폰 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풀터치 스크린을 채택한 프라다폰을 앞세워 글로벌 빅3에 오른 역사가 LG에게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신의 파격성과 노력의 강도에서 잡스보다 더 치열하게 갈망하고, 더 우직하게 밀고 가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LG가 움켜쥐고 일어서야 할 키워드는 투철한 '헝그리 정신'일 것이다.
박진용 산업부 차장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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