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는 오지 않았다… 끝없는 혼란·테러에 공포의 나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권좌에 있던 1979~2003년 이라크의 시아파 무슬림은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았고 가족도 모르게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아랍민족주의 정당 바아스당에 가입하지 않고는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시아파 무슬림들은 "지금보다는 나았다"며 그 때를 그리워한다. 시아파인 파지아 알 아티아 바그다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집에서조차 마음 놓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당시는 후세인만 무서워하면 됐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서 지금 이라크 사람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미국이 9ㆍ11 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 라덴을 잡겠다며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지 10년.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이 기대했던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심각한 전화를 입었고, 테러 세력을 소탕하려는 미국의 군사 공격과 그에 맞선 저항세력의 보복 테러가 이어지면서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테러는 극소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자행했지만,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무고한 이슬람 국가 민간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미국 브라운대 왓슨국제관계연구소가 6월 내놓은 '테러와의 전쟁 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22만4,475명으로 추정된다. 민간인 희생자는 이라크 12만5,000명, 아프가니스탄 1만1,700명, 파키스탄 3만5,600명 등 17만2,300명이며 전쟁으로 인한 난민은 566만5,000명, 해외 이주자는 215만명으로 추산된다.
사정이 특히 심각한 나라는 이라크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무기를 찾아내는데 실패했다. 미국의 침공은 대신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을 부추겨 양측을 내전 직전으로 내몰고 있다. 집권 세력은 무능하고 부패해 국가 재건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계속되는 반미ㆍ반정부 세력의 공격으로 수도 바그다드에서는 7월에만 하루 평균 20건의 크고 작은 폭발과 로켓 공격 등이 발생했으며 이런 와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월 수백명에 이른다. AP통신은 "미국의 후세인 제거를 반겼던 이라크 사람들도 이제는 일상에 직접적으로 다가온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며 민심을 전했다.
아프간 사람들도 혼란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구소련과의 전쟁을 포함해 30년 동안 전쟁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폭력과 파괴, 뒤이어지는 빈곤은 일상에 가깝다. 그런 그들도 9ㆍ11 테러 이후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에서 큰 충격을 받고 있다. 미국 립스콤 대학의 분쟁관리연구소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아프간에서는 2005년 이후 735건의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해 3,753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 오르자라 아시라프 네멧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아프간 사람들이 광범위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할 당시 영공을 개방하며 협조했던 파키스탄은 탈레반 소탕을 목표로 한 미군의 군사작전 특히 무인항공기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미국의 공격에 테러 세력은 아이까지 납치, 자살폭탄테러에 활용하는 등 극단적으로 맞서고 있다. BBC방송의 전문 특파원 무하메드 하니프는 "파키스탄에서는 어린 아이조차 죽기 전까지는 유죄"라며 슬픈 현실을 전했다.
이슬람권 사람들은 5월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사살을 계기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얽히고 설키는, 반복되는 죽음의 사슬이 끊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반이슬람 정서, 그리고 서구에 대한 이슬람의 반감을 치유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전문 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3일자 칼럼에서 "이슬람권 반서방 정서의 뿌리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남겨둔 채 테러리스트를 잡겠다고 들쑤셔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 9·11테러가 한국에 남긴 것
9ㆍ11 사태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한국은 병사와 물자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2001년 해ㆍ공군 수송지원단(상륙함 1척 171명, C-130 수송기 2대 76명)을, 2002년 의료부대인 동의부대(60~100명)를, 2003년에는 공병부대인 다산부대(150명)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다. 2004년 7월에는 이라크 아르빌에 자이툰부대(300명)를 파병해 2008년까지 평화재건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파병은 중동 이슬람세력의 반발을 일으켰다. 특히 2004년에는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무참하게 피살됐다. 김씨 피살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파견 병력을 철수하지 않았다. '반인륜적 테러행위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국이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르완주 차리카에 한국 지방재건팀(PRT) 기지가 세워진 것도 9ㆍ11과 연결된다. 한국 정부는 2010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아프간 PRT 부대와 이를 경호하기 위한 오쉬노 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지난달 제66주년 광복절에 로켓포 6발이 기지에 떨어지는 등 병사들의 안전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특히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이후 한국 PRT 기지가 여덟번이나 공격받은 것은 예사롭지 않다.
9ㆍ11 테러가 한국에게 기회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있다.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리는 데는 미국과 한국의 동맹 관계가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9ㆍ11 사태 이후 국제사회에 핵 테러와 핵 안보에 대한 공통의 노력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핵안보정상회의가 마련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첫 회의를 워싱턴에서 연 뒤 두번째 회의는 한국이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핵무기를 이용한 핵 테러는 한국의 안보 상황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북한이 핵무기 및 핵물질을 개발,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9ㆍ11테러는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에 갈등이 생길 수 있으며 우리도 그 예외가 아니라는 경각심을 갖게 했다"고 평가했다.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뿐 아니라 9ㆍ11 테러 이후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우리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사정원기자 sjw@hk.co.kr
■ 빈 라덴 사살후 알 카에다 위협 줄었지만…
리언 파네타 신임 미 국방장관은 6일 뉴욕 맨해튼의 9ㆍ11추모공원에서 "오사마 빈 라덴 등 알카에다 주요 지도자 3명을 사살했다"며 "알카에다 조직이 심각하게 약해졌다"고 말했다. 미국이 5월 빈 라덴을 사살한 데 이어 7월 2인자 아티야 아브드 알 라만을 제거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는 알카에다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10년에 걸친 미국의 무력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알카에다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알카에다가 점조직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피살된다고 해서 쉽게 와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프리카와 중동 등에서 알카에다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테러 조직만도 300여개에 이른다. 스스로를 알카에다 연계 조직이라 밝힌 보코 하람은 지난달 나이지리아의 유엔 건물에 폭탄 테러를 가해 30여명을 숨지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급부상하는 인물이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 지도자 안와르 알 올라키다. 예멘계 미국인 올라키를 두고 에릭 올슨 전 미국 특전사령관은 7월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열린 안보포럼에서 "앞으로 10년은 올라키가 대표하는 2세대 알카에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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