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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10주년] (2) 유족들의 슬픔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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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10주년] (2) 유족들의 슬픔과 희망

입력
2011.09.0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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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범 가족과 화해… 동생의 꿈 잇고… 용서와 희망으로 살다

9·11 테러가 무고한 시민 3,000명의 목숨만 앗아간 것은 아니다. 부모, 자녀, 배우자, 친구, 동료 등 생전의 희생자와 함께 했던 사람들 역시 지난 10년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슬퍼한 것만은 아니다. 비록 슬픔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지만, 슬픔 속에서 희망을 찾고 용서와 화해, 자선을 실천한 것이다.

아픔을 보듬다

매디슨과 핼리 버넷 쌍둥이, 동생 애나 클레어는 9ㆍ11 테러로 아빠 톰을 잃었다. 쌍둥이는 다섯살, 동생은 세살 때였다. 테러범들이 유나이티드항공 93편을 탈취, 백악관 또는 국회의사당으로 돌진하려 할 때 비행기에 타고 있던 아빠는 기내에서 그들과 맞서 싸웠다. 아빠도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주 생스빌에 추락함으로써 테러범들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매디슨은 그날 아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엄마는 비행기 안에서 걸려온 아빠의 전화에 오열했고 잠시 후 TV를 통해 끔찍한 테러 장면을 지켜봤다.

매디슨은 매일 아빠를 위해 하던 기도를 그 전 날 밤 빼먹었는데 그것이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빠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며 수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매디슨은 "어느 날 기도를 빼먹은 사실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며 "하지만 지금도 마음 한편에 죄책감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매디슨과 같이 18세 이하의 나이에 9·11 테러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 청소년이 3,000명을 넘는다. '9ㆍ11 아동' 가운데는 갓난 아기, 심지어 뱃속 아이도 있었다.

테러 당시 12세였던 로렌과 브리아나 그라지오소 쌍둥이 자매는 세계무역센터 104층 캔터 피츠제럴드 증권회사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일하던 아빠를 떠나 보냈지만 지금은 아빠가 일하던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워드 루트닉 캔터 피츠제럴드 CEO는 "희생자의 자녀들이, 부모가 목숨을 잃은 직장에서 일하려 한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9·11 테러로 희생된 캔터 피츠제럴드 직원 자녀 중 20명 이상이 현재 캔터 피츠제럴드나 계열사 BGC파트너스에서 인턴이나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용서와 화해로 희망을 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근무하던 아들 그레그를 떠나 보낸 필리스 로드리게스는 용서를 택했다. 테러의 주범 자카리아 무사우니의 엄마 아이샤 엘 와피와 우정을 쌓고 있는 것이다. 무사우니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우정을 쌓은 것은 로드리게스가 언론에 나온 아이샤를 보고 정말 용감한 여성이며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샤가 느낀 고통도 나와 같을 것"이라며 "내 아들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왜 테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용서의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바바라 쉔크는 남동생 더그가 하려던 자선사업을 이어가며 아픔을 잊고 있다. 동생 역시 세계무역센터에 있다가 변을 당했다. 쉔크 등 더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2002년 4월 예수전도단(YWAM) 단기선교를 떠나, 트럭이나 택시에서 쪽잠을 자는 가족을 위한 모금에 동참했다. 이후 많은 사람이 자선사업에 뜻을 같이해 현재까지 40개 가정이 집을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쉔크는 "더그가 다 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자선사업을 시작했다"며 "가족을 잃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강한 가족, 강한 믿음, 나라에 대한 강한 헌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 아들 잃은 강성순씨 "아들 이름 딴 학교 만들어… 영원히 함께"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맨해튼 하늘을 보면 가눌 길 없는 슬픔에 가슴이 떨립니다."

9ㆍ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강성순(73)씨 부부는 10년이 된 요즘도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뛴다. "점심 사드리겠다"며 외아들 준구(당시 34)씨가 걸어온 전화인 것 같아서다.

테러가 일어날 당시 준구씨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난리가 나기 하루 전 아들은 "근사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 사드리겠다"며 "내일 점심 시간에 어머니와 함께 회사 근처로 오시라"고 아버지께 전화를 했었다. 이것이 생전의 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세계무역센터 104층의 캔트 피츠제널드 증권회사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하던 준구씨는 9월 11일 출근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가족은 세계무역센터 주변을 비롯해 맨해튼을 백방으로 헤집고 다녔지만 시신은커녕 유품조차 찾을 수 없었다.

"회사가 테러 전날 정리해고자 27명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준구가 포함됐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겠지요." 허망하게 보낸 아들이기에 부질없는 생각도 많이 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유골, 유품 하나 찾지 못한 것. 그런데도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힘들다고 강씨는 말했다.

부부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아들의 뜻을 따라 지난해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에 아들의 이름을 딴 '준구 메모리얼 스쿨'을 열었다. 부부가 6만달러의 종잣돈을 대고 교회 교인들이 헌금을 보태 문을 연 이 학교에서는 현재 150여명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

어머니 강필순씨는 "학교가 있는 지역은 마약과 범죄가 성행하던 곳이었는데 학교가 문을 연 뒤 범죄가 크게 줄었다"며 "아들이 어린 영혼들과 함께 지금도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뉴욕한국일보 서승재기자 seungjaeseo@koreatimes.com

■ 한인 희생자 21명의 유족들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미국의 심장부인 맨해튼 세계무역센터에서 가족을 잃은 한인들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지난 10년을 견뎌왔다.

참혹했던 테러 현장은 어느새 또 다른 기념물이 돼 관광객을 불러 모으지만 유족들은 악몽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날의 아픔을 힘겹게 삭이고 있다.

테러로 목숨을 잃은 한인 희생자는 모두 21명. 대부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였다. 그렇기에 유족들은 한동안 생업을 손에서 놓는 등 큰 실의에 빠졌다. 뉴욕에서 사는 것조차 버거워 상당수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로 옮겼다. 미국 안에서도 샌디에이고, 시애틀 등 뉴욕과 먼 곳으로 떠나가 현재 뉴욕 일원에 살고 있는 유족은 3, 4 가족에 불과하다.

테러로 둘째 아들 재훈(당시 26세)씨를 보낸 김평겸 9ㆍ11한인유족회 회장은 "가족을 잃은 슬픔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며 "매년 이맘때가 되면 외부와 단절하다시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세계무역센터 99층 마쉬&매클래넌사에서 근무하던 딸 조경희(당시 30세)씨를 잃은 어머니 조유리씨는 "유족 대부분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딸 생각을 지우기 위해 나무를 심어 키우고 있다"며 아픔을 전했다.

유가족들은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각종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김평겸 회장은 아들의 영어 이름을 딴 '앤드류 김 장학재단'을 만들어 한인 사회 테니스 유망주들을 돕고 있다. 육 크리스티나씨의 가족들은 딸이 다니던 학교에 장학금 10만달러를 쾌척했으며 추지연씨 가족 역시 한미장학재단에 10만달러를 기증했다.

뉴욕한국일보=서승재기자 seungjaese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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