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4월 2일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 식목일행사를 준비하던 한 일본인이 급성 폐렴으로 갑자기 숨졌다. 부고를 듣고 달려온 조선인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며 "관을 매겠다"고 서로 나섰다. 한국의 산과 민속공예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씨 얘기다.
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는 서울국제친선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아사카와 학술회의'가 열렸다.'시대의 국경을 넘은 사랑-아사카와 다쿠미의 임업과 한국민속공예에 관한 연구'가 주제였다. 독도 영유권 분쟁, 위안부 문제 등 일본과의 크고 작은 마찰이 여전한 지금, 다쿠미 사망 80주기에 맞춰 새로운 한일 관계를 모색하기위해 마련된 자리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축사에서 "좋든 싫든 간에 이젠 글로벌한 세상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100년 전에 보여준 다쿠미의 정신은 단순히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배워야 할 '오래된 미래'"라고 역설했다.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다카네정에서 태어난 다쿠미는'조선 도자기 귀신'이라 불렸던 아사카와 노리다카의 동생이다. 형의 영향으로 그 역시 24세때 조선으로 건너와 총독부 공무원이 됐다. 다쿠미의 생애를 그린 다카사키 소지의 저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엔"(다쿠미는)조선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조선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적혀 있다. 조선의>
다쿠미의 우리 자연과 문화에 대한 애정은 과감했다. 민둥산이 많아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고안했다. 또 조선의 백자와 목공품 등을 다룬 <조선의 소반> 과 <조선도자명고> 를 집필했으며, 24년엔 유명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다. 조선의 흙이 되고 싶다는 유언대로 죽은 뒤엔 한국 땅에 묻혔다.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의 유일한 일본인 묘, 203363호가 다쿠미가 잠든 곳이다.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다쿠미의 삶을 다룬 소설 <백자의 사람> 의 저자 에미야 다카유키는 학술회의 특별 강론을 통해 "다쿠미는 한국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의 행동은 결코 값싼 동정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백자의>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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