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러의 파괴력 전쟁보다 훨씬 강해… 9·11, 승자는 없었다"
9ㆍ11 테러의 고통이 미국인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잦은 무슬림에게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 이슬람계 미국인에게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이슬람의 시각에서 본 9ㆍ11 10주년은 어떤 의미일까. 타밈 안사리(63)는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이슬람 이민 1세대다.
이슬람의 역사와 철학을 다루는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그는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9ㆍ11의 교훈은 테러의 파괴력이 전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힘의 역학구도가 필요한 시점에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대결구도를 고착화한 것이 9ㆍ11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었다. 미국은 두개의 전쟁(이라크ㆍ아프간전)을 통해 아랍 세계와 대결했지만 이는 모든 무슬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의도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대다수 무슬림은 사실 9ㆍ11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삶의 터전을 유린하고 재산을 빼앗는 외국 군대는 아프간을 침탈한 옛 소련처럼 그저 고통을 안겨주는 침략자일 뿐이다. 안사리는 "부시가 원했던 승리도, 오바마가 원하는 종전도 모두 쉽지 않은 문제"라며 "미국은 전쟁의 굴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테러의 원인을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 찾았다. 안사리는 "중동국가들은 서구의 산업화를 따라잡기 위해 엘리트 위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했다"며 "혜택을 공유하지 못한 하층민이 분노를 표출할 방법은 종교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사리는 미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된 이슬람에 대한 증오도 단순히 9ㆍ11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분쟁의 뿌리가 된 경제적 이슈는 이제 피해자인 미국인의 삶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간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하면서 미국인들은 고용 불안감을 상쇄할 목적으로 자신과 남을 구분짓는 동류의식을 키웠고, 유독 서구와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분석했다.
반(反)무슬림 감정은 미국의 무슬림, 특히 젊은 세대에게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그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미국식 문화에 적응하길 원하지만 사회는 이방인으로 취급할 뿐이며, 집에서는 '네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버린 것이냐.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 친다"고 말했다.
안사리는 "서로 다른 가치가 화해할 때 평화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뒤집는다. 대신 모두가 평화를 원해야 비로소 화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랍권을 휩쓴 재스민혁명도 특정 가치체계와의 충돌이라기 보다 세속적 관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며 "이들이 말하는 혁명은 평화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화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타밈 안사리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태어나 16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남동생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심취한 것을 계기로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천착해 왔다. 9ㆍ11테러 당시 이슬람 시각으로 현상을 풀어 낸 글이 화제가 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 9·11 10년 맞은 미국인들 소회
미국 심장부 뉴욕과 워싱턴이 동시 테러를 당한 지 10년. 외형상 미국은 더 안전해졌고 미국인들도 삶 속에서 9ㆍ11을 조금씩 걷어내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미국인 누구도 9ㆍ11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희생자 유족은 슬픔을 견뎌야 했고 시민들은 또 다른 테러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인에게 아픔은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그리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미 국가부채 증가와 경기침체 우려로 나타났듯 향후 10년은 모습을 달리한 후유증에 시달릴 전망이다.
지난 10년에 대해 미국인들은 "미국도 침략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눈 떴다" "세계를 의식하게 됐다"는 식의 반응을 많이 보인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않고 집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거나 "항공여행을 하지 않는다"며 공포를 씻어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플로리다주 초등학교 2학년 수업을 참관하던 중 9ㆍ11 소식을 접했는데 이 장면을 지켜본 당시 학생 라자로 두브로크는 "이제 누구를 두려워할 나이가 지났다"는 말로 일곱살 소년이 겪었던 공포를 떠올렸다. 그는 "세계는 넓고, 우리와 다른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한 이유를 설명했다. 두브로크처럼 아랍어 전공 대학생이 지난 10년간 3배 늘고 작년 미스 아메리카에 중동 출신이 당선되는 등 미국은 무슬림 공포에서 조금 여유를 찾은 듯 하다.
사실 9ㆍ11의 숨은 희생자는 군인이다. 테러세력 응징에 나섰다가 4일 현재 6,230명이 숨졌다. 9ㆍ11 희생자의 2배가 넘는다. 살아남은 군인은 가족붕괴 앞에서 절규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여섯 차례 파병된 미 육군소령 A씨는 "국가는 지켰지만 가정은 못지켰다"고 말했다. 2001년 10월 아프간에 첫 파견될 때는 아내도 자부심을 보였다. 하지만 5년이 흐른 뒤 아내는 "또 파병이냐"고 했고 10년이 되자 별거를 요구했다. 꼬마 아들은 어느덧 대학생이 돼 더 이상 그를 찾지 않는다. 파병 병사를 마중 나온 아내 가운데 30%는 다음날 이혼을 요구했다. 다섯 차례 파병됐던 병사 B씨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는데 "10년 내내 불면증을 겪었다"고 말했다. 미군이 월남전 후유증에서 빠져 나오는데 20년 넘게 걸린 점을 감안하면 군은 앞으로 10년 이상 후유증과 싸워야 할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그래도 9ㆍ11 10년은 매우 뜻 깊은 시간이다. 11일 맨해튼의 추모공원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추모 행사가 열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을 국가추모의 날로 정하고 10년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선 공항처럼 사람이 모이는 장소의 보안검색을 강화하고 뉴욕시 지하철은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연방수사국(FBI)과 국토안전부는 소형 개인항공기 테러 가능성을 경고했다. 아직도 9ㆍ11 망령과 싸우고 있는 미국 및 미국인의 모습이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 건설에 참여한 한국계 미국인 조수아씨
"아픔을 다독여주는 위로의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9ㆍ11추모공원 건설에 참여한 한국계 미국인 수아니 조(44ㆍ한국 이름 조수아)씨의 바람은 이 공원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그래서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제는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나 10년 전을 기억하고 그때 스러진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난 6년 동안 밤낮 없이 매달린 이 일에서 큰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추모공원 사업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계인 조씨는 공부를 하러 건너온 아버지를 따라 1975년 미국으로 왔다. 조씨는 다트머스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뒤 뉴욕주립대에서 예술사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도시건축 석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_추모공원 건설에는 어떻게 해서 참여했나.
"추모공원과 추모박물관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스라엘 출신의 건축 디자이너 마이클 아라드가 함께 일하자고 요청해왔다. 샌프란시스코시 교통과에서 대중교통 디자인 일을 하고 있던 나는 이 일의 의미가 클 것이라고 판단해 2005년 6월 합류했다. 거처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옮겼다."
_왜 이 일에 참여했는가.
"테러로 상처받은 사람과 도시를 치료하고 싶었다. 도시계획을 하는 사람으로서 뉴욕 재건에 참여하고 싶었다. 추모공원 건설이 뉴욕의 심장을 다시 세우는 일이라 믿었다."
_어떤 일을 맡고 있는가.
"처음에는 추모공원 건설을 위한 조직이 매우 작아 디자인과 기획 전반에 관여했다. 마이클 아라드, 피터 워커 등 건축 디자이너들과 함께 환경을 강조한 그린 디자인의 개념을 실현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4년을 일한 뒤 2009년부터 추모공원 개장 행사를 위한 전시공간 디자인 일을 했다. 지금은 추모공원 보안문제와 입장권 발매를 포함한 운영 전반을 위한 설계를 하고 있다."
_추모공원에서 가장 의미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
"당연히 두 개의 거대한 연못이다. 두 연못에는 한때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건물이 있었다. 많은 사람의 소중한 일터였다. 연못을 보면서 10년 전 그 사람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_추모공원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것은.
"지표면 9m 아래 지하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어 별도의 추모공간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안전상의 문제도 제기됐다. 그래서 광장의 연못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 넣기로 수정했다. 디자인의 핵심이 바뀐 것인데 그러다 보니 추모공간과 공원을 분리하려던 본래의 의도를 다 살릴 수 없었다."
_보람이 컸을 텐데.
"캐나다에 주문한 공원 모형을 확인하러 갔다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공원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조명을 켠 뒤 공원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보람을 제대로 느꼈다."
_추모공원이 어떤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가.
"지금은 많은 뉴욕 시민이 9ㆍ11의 충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건 발생 당시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9ㆍ11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한때 심했는데 거기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9ㆍ11 자체를 외면했다. 추모공원이 문을 열면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10년 전을 떠올리고 그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9ㆍ11 테러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슬픔을 극복하는 공식적인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뉴욕=글ㆍ사진조영호기자 you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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