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암퇘지의 눈, 코, 입을 가득 메운 상아색의 꿈틀거림. 그것은 구더기였다. 돼지 사체의 눈알은 구더기에 갉아 먹혀 보이지 않았다. 아래턱과 혀가 사라져 돼지가 입을 반쯤 벌리고 죽었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위를 파리 수백 마리가 윙윙거리며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딱정벌레 몇 마리가 구더기를 잡아먹으려고 사체 주변에 몰려들었다.
우글우글 구더기가 열쇠
1일 인천 서구 경서동에 위치한 국립생물자원관. 자원관 한 귀퉁이에 있는 풀밭에 들어가자 역한 암모니아 냄새가 확 풍겼다. 지난달 30일 잡아 이곳에 놔둔 무게 25㎏의 암퇘지. 돼지 사체의 머리는 구더기로 덮여 있었다. 국립생물자원관 곤충연구팀 박선재 연구원은 "피 냄새를 맡고 온 파리가 사후 30분 안에 눈, 코, 입에 먼저 알을 낳기 때문에 머리 주변에 구더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들 부위는 점막으로 돼 있어 구더기가 피부 안으로 침투하기 좋다. 구더기는 소화액을 분비해 피부나 근육을 녹여서 먹는다.
윙윙거리며 날던 파리들은 이따금 햇빛에 노출되지 않은 사체의 사타구니에 앉아 알을 낳았다. 그들 주변엔 긴 모양의 노랗고 매우 작은 알들이 수없이 많았다. 사체에 몰려든다고 해 '사체곤충'이라 불리는 검정파리, 쉬파리, 집파리의 알이다. 알은 보통 10시간 후 부화해 구더기가 된다. 박 연구원은 "징그러운 구더기나 파리가 사람이나 동물이 얼마 전에 죽었는지 알려주는 열쇠"라고 말했다.
사체곤충은 알고 있다
사체는 사망→팽창→부패→건조→백골화 단계를 거쳐 분해된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여름에는 분해가 빨라 1, 2주만에 백골화까지 진행된다. 봄과 가을에는 40여일이 걸린다.
이 때 나타나는 사체곤충은 크게 세 분류다. 사체에 알을 낳는 파리와 파리 유충인 구더기를 먹으러 오는 딱정벌레, 딱정벌레의 몸 속에 알을 낳는 기생벌과 기생파리다. 분해 단계마다 나타나는 곤충이 달라 이를 역추적하면 사후 경과 시간을 알 수 있다.
기온이 26도, 습도가 70%일 때 검정파리의 일종인 구리금파리의 알은 14시간 뒤 부화해 구더기가 된다. 이 때 구더기를 1령 유충이라고 한다. 파리가 되기까지 구더기는 총 세 번 허물을 벗는다. 그때마다 크기가 커지고 꼬리 끝에 있는 공기 구멍이 하나씩 늘어난다. 22시간이 지나면 허물을 한 번 더 벗어 공기 구멍이 두 개인 2령 유충이 된다. 하루 뒤엔 3령 유충이 되고, 5일 뒤 번데기를 거쳐 성충 파리가 된다.
가령 사체에서 구리금파리 3령 유충이 주로 보인다면 죽은 지 60시간 이상 지났다는 얘기다. 1령 유충이 허물을 두 번 벗어 3령 유충이 되는 데 최소 60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를 법의곤충학(Medicolegal entomology)이라고 한다. 미국의 범죄수사드라마 'CSI 라스베가스'의 주인공 길 그리섬 범죄수사국장도 법의곤충학자다. 고려대 법의학연구실 신상원 연구원은 "죽은 지 72시간이 지나면 각막의 투명도나 체온 등 사체만으론 사후 경과 시간을 알 수 없다"며 "이럴 때 사체곤충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법원에선 사람이 언제 죽었는지 알리는 주요 증거로 곤충을 채택하는 경우가 10건 중 8건으로 매우 높다.
미국 시체농장 운영…한국은 아직 걸음마
외국에선 1960년대 이미 법의곤충학 연구가 시작됐다. 한국에 이 학문이 소개된 건 1990년대 후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는 "2000년대 중반부터 연구를 조금씩 하고 있지만 사체 감정에 곤충을 쓸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립생물자원관도 올해부터 법의곤충연구를 시작했다. 걸음마 단계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선 사체곤충을 법정증거로 채택하지 않는다. 연구가 부족해 온도와 습도 등 여러 조건에 따라 사체곤충의 발생 시간과 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체 대신 동물의 사체로 연구를 하는 점도 언제 어떤 곤충이 나오는지 정확하게 아는 데 걸림돌이다. 미국에선 기증받은 시체로 실험하는 '시체농장(body farm)'을 운영한다. 신 연구원은 "국내에서 돼지 사체로 많이 연구를 하는 이유는 시체를 기증받기도 어렵지만 돼지가 잡식성이면서 장기가 사람의 것과 90% 이상 비슷하고 피부에 털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예전에는 사건 현장의 사체에 곤충이 있으면 살충제로 다 죽인 다음 사체를 옮겼는데 지금은 인식이 바뀌어 곤충을 채집한다고 들었다"며 "앞으로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연구한다면 선진국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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