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내 건 집은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집, 노란 깃발을 꽂은 집은 반대하는 집입니다." "아……." 차창 밖 강정마을 풍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평화 버스' 승객들이 일제히 얕은 탄식을 뱉어냈다. 나무에 달린 새파란 감귤, 돌담 아래 핀 맨드라미는 제주 여느 시골마을의 풍경이었지만 그 위에 솟은 두 가지 깃발이 강정의 분열을 한 눈에 드러내고 있었다. 사회적기업인 제주생태관광 윤순희씨는 "아무 깃발도 없는 집은 4년 전 내 건 노란 깃발이 바람에 떨어졌거나 가족 중에 공무원이 있어 찬반 표시를 꺼리는 집"이라고 덧붙였다.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시작된 지 4년여 만인 3일 전국에서 200여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이날 낮 김포공항에서 '평화의 비행기'를 타고 제주국제공항에 도착, '평화 버스'로 갈아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제주 남쪽에 위치한 강정마을에 닿았다.
동화작가, 교수, 인권활동가, 목사 등 다양한 직업만큼 평화비행기에 오른 이유도 제각각 이었다. 서울에서 온 이수갑(86)씨는 "일본 강점기 때 일본군에 강제 연행되기도 하고 20대 때 한국전쟁을 겪으며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다"며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화약고가 될 것 같아 오게 됐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3세인 20대 여성 A씨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왔다. A씨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이 제주라서 제주의 평화를 지키고 싶어 동참했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김모(31)씨 등 30대 여성 3명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제3차 희망버스'에서 처음 만나 이번에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다시 뭉쳤다. "강정마을을 외면하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는 환경운동 활동가, "중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직접 강정마을을 보고 이 풍광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지러 왔다"는 주부 등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강정마을에 발을 내디뎠다.
오후 4시쯤 마을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법환포구를 시작으로 올레길을 걸었다. '길이 가장 험하지만 가장 아름답다'는 올레길 7코스다. 군데군데 절벽은 밧줄을 잡아야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팔랐고 오솔길 양쪽으로 무성하게 자란 수풀은 맨 살에 생채기를 냈다. 해안 현무암에 올라앉아 있던 바다 생물들은 사람 발소리에 놀라 돌 밑으로 숨어들었다.
훼손되지 않은 주변 자연은 참가자들을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동화작가인 아내 김현주(36)씨, 아들(4)과 함께 강정을 찾은 서석준(37)씨는 연신 "왜 하필 이곳에…"라며 안타까워했다.
왼편에 바다를 끼고 약 2㎞를 걸은 순례 여정은 강정천 운동장에서 끝났다. 당초 구럼비 해안까지 갈 계획이었지만 전날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 펜스를 설치하면서 이제 민간인은 구럼비 해안을 볼 수 없게 됐다.
건설반대 진영 강정주민들과 제주도민들은 '평화 비행기' 일행을 반색하며 맞았다. 강정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홍동표(53)씨는 "정부는 뭍 사람들을 '외부세력'이라며 문제 삼지만 진짜 외부세력은 주민들을 갈라놓은 해군과 건설업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도민과 평화비행기 일행 등 2,000여명(주최측 추산)은 이날 운동장에서 오후 10시까지 평화 콘서트를 열고 강정의 평화를 기원했다. 경찰과 충돌은 없었다.
펜스 설치로 공사 재개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해군기지 건설반대 진영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인권운동가 엄명환(30)씨는 "지금은 비록 반대 주민들과 평화 비행기의 힘이 미약하지만 국민들의 반대 여론이 지속된다면 결국 '질긴 놈'이 이기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제주해군기지건설저지를위한전국대책회의는 다음달 1일 제2차 평화의 비행기 행사를 열어 강정마을 평화 순례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한편 경찰은 지난 1~3일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한 혐의로 연행하거나 체포한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 39명 중 홍기룡 제주군사기지저지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등 4명을 4일 구속했다.
서귀포=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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