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영웅을 만든다. 보통은 승전국 지도자나 장수가 그 영예를 차지하지만 미디어가 전투현장을 속속들이 취재하게 된 현대전에서는 종군기자들도 스타가 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한 병사의 단말마를 순간 포착한 불멸의 사진(어느 왕당파 병사의 죽음)을 남긴 로버트 카파, 베트남전 등 숱한 전투현장을 누빈 여성 종군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1991년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공습을 독점 보도하며 CNN을 세계적 뉴스전문채널로 끌어올린 피터 아네트 등이 그 예다.
전장 누비는 엄마 종군기자
이번 리비아 내전이 배출한 스타 기자는 영국 스카이뉴스의 특파원 알렉스 크로퍼드(49)다. 8월말 시민군이 트리폴리로 진입하며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철권에 종지부를 찍던 순간 크로퍼드는 특파원 중 가장 먼저 트리폴리로 들어가 시내 중심부 녹색광장에 진입한 시민군의 모습을 보도했다. 당시 스카이뉴스 말고는 아무도 트리폴리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카다피측 반격이 심했더라면 매우 위험했을 수 있는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정부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크로퍼드는 트리폴리 시내를 누비며 특종을 쏟아냈다. 그 순간 전통적으로 국제분쟁에서 신속ㆍ정확한 뉴스로 이름 높은 BBC의 보도는 트리폴리 외곽 상황 중계에 머물러 있었다.
크로퍼드는 지방신문과 BBC를 거쳐 1989년 새로 개국한 스카이뉴스로 옮긴 베테랑 기자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 곳곳을 현장 취재했고 2008년 11월 인도 뭄바이 폭탄테러 때는 아직 폭발로 화재가 멈추지 않던 타지 호텔에서 현장 생중계를 감행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나 동남아시아 쓰나미 등 대재난의 현장도 종종 찾는다.
올해의 기자상을 세 차례나 받은 이 민완기자의 이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네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과 엄마의 역할을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최근 리비아에 머물며 에든버러 국제TV페스티벌과 위성전화를 통해 가진 인터뷰에서 이 질문을 받자 "사실 아이들이 나에게 일하러 가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고 엄마는 학교에 왜 급식봉사 하러 오지 않느냐는 얘기도 한다"며 평범한 엄마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또 "이건 나 같은 외벌이 엄마들의 공통 딜레마"라며 "그래도 나는 우리 딸들에게 훌륭한 역할모델이 되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사실 크로퍼드가 기자 본연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비결은 남편 리처드 에드먼슨의 외조다. 일의 속성상 외국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은 크로퍼드를 대신해 에드먼슨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그 역시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서 일했던 전직 기자다.
"종군기자는 불편부당할 수 없다"
다른 기자가 철수할 때 전선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위험을 느껴서가 아니라 승리 축포 때문에 헬멧과 방탄조끼를 착용한다"고 말하는 이 강골(强骨) 기자도 죽음을 각오했던 순간이 있었다.
3월 리비아 시민군을 따라 트리폴리 서쪽 도시 자위야에서 취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민군이 정부군의 함정에 빠지는 바람에 전세가 역전됐고 이슬람 사원 안에 있던 크로퍼드도 정부군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되는 상황을 맞았다. 정부군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를 위험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크로퍼드는 오히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속으로 그는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크로퍼드는 "남편에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말하면서도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경험은 적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 처음 며칠은 충격을 실감하지 못했지만 3일이 지나서 눈물이 쏟아졌다.
크로퍼드의 신조는 "종군기자는 중립적 입장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기자는 불편부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고 강변했다.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민간인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중립이란 말은 그저 제삼자가 떠들어대는 한가로운 사치에 불과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크로퍼드는 카다피의 축출로 정부군과 시민군의 역학관계가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언론이 시민군의 행위에 보다 면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민군이 친카다피 세력에 앙갚음을 다짐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 쪽에 좀 더 취재의 비중을 둘 생각"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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