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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A4 30장 퇴임사' 김규헌 검사 파란만장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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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A4 30장 퇴임사' 김규헌 검사 파란만장 30년

입력
2011.09.0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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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검사생활이 마치 한 편의 소설과 영화같다는 평가를 받는 이는 드물 것이다. 성공한 검사가 대부분 차곡차곡 승진의 사다리를 밟아 나간 경우라면 그는 그 반대에 가깝다. 거센 압력과 회유, 그리고 수사방해에도 꿋꿋이 수사의 정도를 걷다 부러지기를 반복했다.

한상대 검찰총장과 같은 사법연수원 13기 출신으로 1일 정기인사에서 검찰을 떠난 김규헌(57) 서울고검 검사. 그가 몇 차례의 살해위협, 2002년 연예계 비리수사 당시 외압으로 인한 좌천 등 파란만장했던 검사 생활을 정리한 A4 30여장 분량의 퇴임사를 검찰 통신망에서 올리자, 후배 검사들은 "한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 "한 세월을 풍미했던 검사의 퇴장" 등의 헌사를 남겼다.

퇴임사는 1980년대 후반 부산지검에서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의 일화로 시작한다. 수사기록과 씨름을 하던 중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너, 이 XX, 네 배에는 철갑을 둘렀니? 외지 놈이 굴러들어와 설치는데 사시미(횟칼) 칼침 한번 맞아봐야겠어?"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현직 검사에 대한 조폭의 살해위협 사건의 한 장면이다. '양산박 이래로 관군에는 대항하지 않는다'는 조폭의 불문율도 이 때 처음 깨졌다고 한다.

지난달 30일 서울고검 사무실에서 만난 김 검사는 "칠성파의 숨겨진 실세를 구속하고 부패 공무원들과의 결탁 혐의를 캐기 시작하던 때"라며 "언론을 통해 살해위협이 보도되고 상대측의 인사운동이 통했는지 그 해 가을 자리를 옮겼다"고 회고했다. 이 무렵 김 검사가 수십명의 조폭 검거를 현장에서 지휘한 일화는 나중에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2'도입부에 각색돼 소개됐다.

무용담 중엔 94년 서울지검 형사3부 수석검사 시절 수사했던 종교연구가 탁명환씨 살해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배후 여부를 추적하던 때였다. 김 검사는 "총리가 장로로 있고 교인 중에도 군 고위장성, 검찰 간부가 즐비해 교회의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말했다. 탁씨가 2년 전 승용차 폭파 테러로 부상당했을 때 사용된 폭발물이 군에서만 쓰는 'C-4'라는 사실을 캐기 시작하자 "승진할 때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장래도 생각하셔야죠" "당신 자식들 아직 어리던데 걱정도 되지 않나" 등 회유와 압력이 노골화했다. 언론에 협박사실이 보도되자, 그는 이번에도 수사를 중단한 채 부산지검 동부지청으로 쫓기듯 내려가야 했다. 그 무렵 그는 술집에서 귀가하던 중 언덕에 주차돼 있다 별안간 속도를 내고 돌진해오는 차에 부딪치는 의문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퇴임사에는 춘천지검 강릉지청 근무 시절 청사에 라이플 총을 들고 나타난 괴한과 맞닥뜨렸으나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일화, 법무부 법무실 근무 시절 동독 붕괴 직후 떠난 독일 출장 도중 아우토반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일화 등도 소개됐다.

그의 전성기는 2001~2002년 서울지검 강력부장 시절이다. 양은이파 두목 출신인 조양은씨를 구속하고, 조폭이 개입된 사채조직, 도박단, 고속도로 휴게소조직, 부정경마 커넥션 등을 파헤쳤다. 이 무렵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언터쳐블(Untouchable)'이다.

하지만 가장 큰 위기도 이때 찾아왔다. 강력부가 2002년 7월10일 연예기획사 수사에 착수하자 주요 방송사 PD들이 잠적하는 바람에 프로그램 제작이 마비될 정도라는 하소연 섞인 불만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던 중 연예기획사와 PD 다음의 수사 타깃은 정ㆍ재계 인사의 연예인 성상납 의혹이라는 소문이 수사를 꺾는 결정타가 됐다. 수사 시작 한 달 만에 강력부장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는 "정기인사 1주일 전만 해도 상부에서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는 법은 없다'며 인사대상 제외통보를 받아 인사가 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인사 당일 지방 발령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정치권의 압력을 받은 법무ㆍ검찰 지휘부가 김 검사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고 주장했다.

김 검사는 '당시 거론됐던 정치인은 누구였냐'는 질문에 대해 "꽤 여러 명의 유력 정치인이 홍콩 싱가포르 제주도 등지에서 여성 연예인과 만났다는 첩보를 갖고 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는 김대중 정부의 핵심 실세 두 사람도 포함돼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그는 그러나 "분명히 얘기할 것은 당시 성상납 부분은 본격적으로 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진척된 내용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김 검사가 충주지청장으로 발령난 이후 연예계 비리 수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나 영화배우 장자연씨 접대 강요 사건이 불거지면서 연예계의 고질적 성상납 비리가 근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됐다.

충주지청장 시절 꽃동네 오웅진 신부 사건의 신병처리를 놓고 지도부와 또다시 맞서다 한직을 전전하던 김 검사에게 2006년 9월 청천벽력과 같은 암 선고?떨어졌다. 수술은 잘 된 편이었지만, "앞으로 5년 동안 재발이 없어야 한다"는 경고가 따라 붙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러, 이제 그는 검찰을 떠난다. 그에게 검사로서 회한이 있는지 물었다. "개인적 불이익에 대한 섭섭함이나 울분을 토로하기보다 그럴 때일수록 앞에 보이는 악과 상대하는데 힘을 쏟으려고 했다.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으나 후회는 없다." 검찰 내에서 재즈, 발레, 오페라, 클래식 애호가로 유명해 '마지막 아티스트 검사'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그는 당분간은 휴식을 즐기며 인생 2막을 준비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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