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라는 나이에 MC로 활동하는 사람은 송해밖에 없다. 그가 전국노래자랑 MC를 처음 맡은 것이 58세 때였다. 남들 같으면 은퇴할 나이에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8년이 흘렀다. 이제 전국노래자랑은 그의 상징이 됐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쇼를 한다. '나팔꽃 인생 송해 빅쇼'는 추석 연휴기간인 12, 13일 이틀 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다. 실향민의 아픔을 담았단다. 나팔꽃은 축음기 머리 모양이다. 아침에 피고 저녁이면 지는, 기약 없는 소리꾼의 인생과 닮았다. 마포아트센터에서 땀 흘리며 연습하는 있는 그를 만났다.
_ 지금 85세다. 현역 활동하는 데 건강은 문제 없나.
"남들은 걱정을 하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조 기자도 친구처럼 느껴진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세월이 많이 갔구나, 내가 왜 근력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또 한 가지, 책임을 느낀다. 잘했든 못했든 지금껏 잘 살아왔는데 내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이분들(시청자를 의미하는 듯)을 저버리는 기분이 든다. '이들에게 등한히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즐겁게 살 수 있다. 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_ 평소 소주 2병 정도는 마신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술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한다. 옛날 어른들은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그랬는데, 역시 기분 좋으면 없어서는 안될 것이 술이다. 특히 남자가 술 한 잔 못한다면 어딘가 마음이 열리지 않은 것 같다. 상대에게 '약주 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안 한다'고 하면 거기서부터 말문이 막힌다. 반대로 '한 잔 하시죠' 하면 속이 탁 트이는 것 같다. 나를 상대하는 사람들이 대개 모주꾼들이다. 한국일보 얘기를 좀 하면, 정홍택씨라고 있다. 우리들하고 정말로 똘똘 뭉쳤던 멤버들 중 하나다. 이 사람이 신문사에서 팀장쯤 할 때였는데 앞에 술잔이 없으면 아예 얘기를 못했다. 또 청진동에 해장국집을 하던 최창익씨도 우리 멤버였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떴다. 술이라는 게 술술 넘어가는 것이지만 말도 술술 나오게 하는 것이 술이다. 세월이 흐르니까 과음은 안되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다. 먹고 싶은 마음에 술을 넘기긴 넘기는데 그 다음날 고달프면 안되니까 조심하는 편이다. 그래도 평생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술꾼이다.
신이 나면 소주 두 병은 모자란다. 하루 평균 두 병은 한다. 종로에 상록회라고 사무실을 하나 가지고 있다. 거기 나오시는 분들은 대중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종사하던 분들이다. 영화배우 영화감독 가수 연극인 희극인 전부 다 나오는 사무실이다. 그런데 자리가 많이 비었다. 세상을 많이 떠났다. 최무룡, 홀쭉이, 뚱뚱이 다 우리 멤버였다. 20년 정도 사무실 운영하고 있다. 이분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적적해 한다. 집에 있으면 몸이 약해지니까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갈만한 데가 없다. 그래서 나오는 곳이 우리 사무실이다. 그러니까 사랑방이다. 한 달에 한번씩 월례회를 한다. 통상 점심들 드시고 나와서 오후 6시쯤까지 있다가 헤어지는데 그냥들 못 간다. 서로 얼굴 쳐다본 다음에 '가자'고 하면 한잔씩들 하고 간다. 오히려 그게 건강을 도와주는 길이다. 나오시면 가만 있지 않는다. 바둑 두는 분, 마작 놓는 분도 있고 대화만 하는 분도 있다. 그러다 보면 정신이 딴 데 팔릴 시간이 없다. 우리 상록회 나오는 분들 중에 치매 걸린 분이 없다. 다 80대이고 90세에 가까운 분들도 있다. 영화배우 윤인자씨도 나온다. 대한민국 여배우로서 최초의 키스신을 한 분이다. 90세가 넘었는데도 아주 건강하다. 그걸 보면서 '아이구, 선배님들이 저렇게 건강한데 내가 휘청거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_ 사랑방 운영은 어떻게 하나.
"사무실을 운영해본 분들은 안다. 아무래도 돈이 들어간다. 6개월, 1년 만에 집세 올려달라고 그래서 속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춥고 비 오고 눈 오는데 사무실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다. '저분이 여기 나올 생각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뿌듯하다. 벌이가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지만 내 몸이 움직여서 돈을 벌 수가 있다면 끝까지 모실 수 있도록 사무실을 계속 운영하려 한다."
_ 건강 비결은 뭔가.
"벌써 30~40년 지난 얘기지만 당시 우리 생활이라는 것이 내일을 기약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솔직히 3년이라는 계획조차 세워본 적이 없다. 그때 가까이 한 것이 술 담배밖에 없다. 술 담배가 친구였다. 결국 병원에 갔다. 서울에 유명한 병원이라고는 메디칼센터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서 6개월 동안 있다 た都? 홀쭉이, 뚱뚱이, 구봉서, 배삼룡씨 등이 병 문안을 왔다. 퇴원을 하는데 당시 주치의가 담배와 가깝든지 나랑 가깝든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무서운 얘기구나 싶었다. 의사를 만나면 살고 담배랑 살면 죽는다는 얘기였다. 현관을 나오면서 담배를 뽑아 들었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그날부터 담배를 피지 않았다. 통원치료를 하면서 처음 약을 타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요즘 담배는 어떻게 했소'라고 물으셨다. 그래서 '선생님 얘기 듣고 끊었습니다'라고 하니까 박수를 치더라. 그리고는 '앞으로 운동을 하셔야 하는데 심하게는 하지 말라'고 했다. 예를 들면 계단 같은 것을 오르면서 9층 높이 아파트를 하루 3번 정도 오르내린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기 시작했다. 20년도 넘었다. 지하철이 요즘은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그 전엔 다 계단이었다. 집에서 시내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계단을 하루에 오르내리는 것을 계산해 보니까 9층 아파트 서너번 오르락내리락하는 정도였다. 이걸 가르쳐주셨나 보다 생각했다. 물론 그 분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렇게 깨달은 것이다. 이후에는 죽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니까 건강이 좋아졌다. 2주일에 한번씩 약 타먹고 했더니 내가 느낄 만큼 몸이 좋아지고 회복이 되었다. 그래서 이날까지 이렇게 온 것이다. 내 몸이 정상으로 가면 식욕도 온다. 술을 많이 먹어도 금방 깨어난다. 몸이 피곤할 때 술 많이 먹으면 괴롭지만 운동을 그 정도 하고 나면 개운하다. 양재동으로 이사간 뒤에는 양재천에 간다. 양재천은 나무숲이다. 걷는 분들이 많다. 아침에 여유 있을 때는 3, 4블록 왕복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거 하고 나서 식사하면 하루가 거뜬하다."
_ '나팔꽃 인생 송해 빅쇼'를 하는데, 나팔꽃은 무슨 의미인가.
"나팔꽃, 참 내가 꽃 얘기를 하면 슬그머니 화를 내는 사람이다. 봄철이 되면 벚꽃축제, 벚꽃축제 하는데 이건 잘못된 것이다. 벚꽃은 일본의 사꾸라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재래종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많은가.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가 먼저 피지, 벚꽃이 먼지 피지 않는다. 지금 국회의원 하는 류근찬씨가 KBS에서 보도국장 할 때 만나서 건의를 했다. '봄철만 되면 여의도 윤중로에 왕벚꽃이 피고 벚꽃축제를 한다. 이거 왜 이러냐. 우리꽃이 얼마나 많으냐. 봄꽃축제는 맞지만 벚꽃축제는 아니다'라고 했더니 금방 수긍을 하더라. 그 다음부터 KBS 아나운서 멘트가 전부 봄꽃축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중에 나팔꽃이라는 것이 정말 희귀하면서 기특하고 보기도 예쁘다. 이게 축음기 머리같이 생겼다. 아침에 활짝 폈다가 오후 2, 3시 되면 진다. 그런데 아주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 다음날 다시 활짝 핀다. 우리 생활이 아침에 폈다가 저녁에 시들었다가 아침에 다시 핀다. 그리고 거기서 소리가 나는 느낌이다. '아! 나팔꽃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처럼 폈다 졌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심사를 하던 신대성씨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 육중한 분이 돌아가시는 걸 보니 사람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분이 전국노래자랑을 하러 갔던 어떤 마을에서 추어탕 먹고 나오는데 '선생님!' 하고 불러서 가봤다. 담을 타고 나팔꽃이 감아 올라가는데 그렇게 소담할 수가 없었다. 그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우리 인생이 바로 이겁니다'라고 설명을 했는데 그게 맞았다. 그날 바로 올라와서 작사가 김병걸씨에게 얘기를 해서 바로 '나팔꽃 인생'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그게 지금 내 노래다. 우리 생활도 바로 나팔꽃 인생이다.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내는 직업이다. 지금은 내 이름이 되어버렸다."
_ 쇼는 어떻게 진행되고 누가 출연하나.
"선배는 이제 구봉서 선생 한 분밖에 안 남았다. 요새 개그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시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바로 아래 또래들은 마땅한 자리가 없다. 임희춘, 남성남, 남철, 배일집씨 등 70~80명 된다. 이 사람들이 활동할 곳이 없다. 처음에는 이들을 모아서 쇼를 해볼까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아서 다 넣지를 못했다. 나보다 한 20년 아래 멤버들을 모았다. 김학래 이용식 엄용수씨랑 넷이 각 분야를 대표해서 한다.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는 분들은 실향민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처절했던 한국전쟁 시절, 스물한살 때 혈혈단신 나오면서 겪었던 고통, 이걸 다 나열하려니 시간이 안됐다. 그래서 부산 가서 고생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것까지를 노래로 엮었다. 서울에서 악극단 만나서 단체생활 하는 내용까지다. '홍도야 우지 마라'부터 시작한다. 원래 연극 타이틀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다. 거기 여주인공 이름이 홍도다. 이걸로 단막극 하나 한다. '홍도야 우지 마라'는 당시 무대에서 신파조로 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여러 극단을 다녔다. 그 당시는 노래 하나로는 밥을 못 먹었다. 만능 탤런트가 되어야 했다. 노래도 하고 악극에서 단역도 하고 무대장치 바꿀 때 관중들 심심하지 않도록 코미디도 해야 했다. 이동할 때는 선배들 보따리도 메야 하고, 쉬는 날은 선배들 양말도 빨고, 그런 연수과정을 겪었다. 그러다 방송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기반이랑 방향이 조금 잡혔다. 그 전에는 3년이 아니라 사흘이 보이지 않았을 때다. 전쟁 후 복잡할 때였다.
국악인들도 등장한다. 국악은 우리 것이다. 어떤 면에서 국악인들에게 예우는 많이 해주는데 활동은 소강 상태다. 국악단도 있고 공연장도 많지만 대중들하고 호흡하는 것은 방송에도 한두 프로밖에 없다. 우리 소리도 한번 어울려서 해보자 해서 15분 정도 한다."(이때 OBS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구봉서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은 이번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_ 구봉서씨는 자주 만나나.
"구봉서 선배는 내가 모시는 윗분들 중에 한 분밖에 안 남으신 분이다. 선배님은 원래 멋쟁이고 체구도 좋은데다가 식도락가에 대식가다. 자주 대포하는 사이다. 그 형님은 원래 몸이 호리호리했고 바짝 말랐었다. 바지 허리가 24인치였다. 걸어다니는 것 조차도 웃겼다. 아마 프로그램에서 누가 친하냐고 물으니 나를 찍어서 전화를 하신 것 같다."
_ 쇼에서는 어떤 노래를 부르나.
"가장 마음에 와닿는 노래는 6ㆍ25 때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다. 내 동생 이름이 금순이는 아니지만 생이별을 했다. 그리고 부산 가서 고생할 때 처량한 놈팽이로 다리 난간에 앉아서 불렀던 '경상도 아가씨', 부산 국제시장 안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장사하는 분위기를 그린 노래, 서울로 와서는 '저무는 충무로' 같은 것이다. 가사가 좋다. '서러운 일 많아서 서울이더냐 의지없는 천사들 … 길거리에서 굴뚝에 등을 대고 몸을 녹이는… 황혼의 고동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런 가사들로 구성된 그때 노래는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했으니 가슴에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또 그리운 노래, 추억의 노래, 다시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많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불렀던 '번지 없는 주막'부터 시작해 많이 유행했던 박재홍 선생의 노래도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안 계시는 분들의 노래가 태반이다. 또 그 분들을 아시는 분들이 추억으로 불러보고 싶은 노래들이 그런 것이다. 거기에 맞췄다."
_ MC가 아닌 가수로서 쇼를 하는데 감회는 어떤가.
"어디 가서 노래를 실컷 같이 불러보고 싶었다. 노래에 내 인생 사연이 다 있다. 한번은 직능 대표들 연수를 갔는데 스님이 한 분 나와서 추억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스님이 어떻게 염불을 안 하시고 대중가요를 부르십니까'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지금 우리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가 경전이다'라고 했다. 효심의 노래, 애정의 노래, 자비의 노래 등등. 그는 노래는 한번 불러서 흘릴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을 거쳐오면서 우리가 불러왔던 노래는 경전이고 성경이고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보니 의미가 더 깊어지더라. 요즘 젊은이들 만나면 '흘러간 노래 하나 부르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내가 막 뭐라고 그런다. '왜 흘러갔냐'는 것이다. 지금도 부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하는데 사랑 노래, 부모님에 대한 노래가 많다. 또 애정에 대한 노래가 얼마나 많은가. 흘러갔다고 하지 말고 추억의 노래, 그리운 노래라고 하라고 한다. 후배들은 나만 보면 그렇게 한다. 의미가 있다."
_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아 28년이나 장수했다. 비결은 뭔가.
"프로그램이 31년째고 내가 한 것이 1984년부터 28년째다. 사실 이 프로를 하면서 내 인생의 가닥이 조금 잡혔다. 무슨 얘기냐 하면, 현장에 꼭 가야 하고 전국 다 갔고, 마음으로 동경했던 외국도 많이 갔다. 외국 사람들도 많이 나온다. 제일 가보고 싶었던 평양도 금강산도 가봤다. 내 일생에 잊지 못할 정말로 '뼈' 같은 프로그램이다."
_ 지겹다고 느끼거나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녹화를 하는데 추석 같은 명절에는 생방송으로 한다. 아파도 안된다. 특집은 생방송이 많다. 그 프로가 내 인생의 길을 잡아줬다. 초창기에 했던 것을 지금 보면 가관이다. 여자들은 대개 치마저고리 입고 파마를 했다. 10명에 7, 8명은 그랬다. 남자들은 남인수 선생처럼 꼿꼿하게 서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가만히 노래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여자들 헤어스타일도 달라졌다. 노래가 얼마나 변했나. 외양, 노래, 분위기부터 환경이 자꾸 달라지니까 자꾸 새로워졌다. 내가 젊은이들 못 따라가면 안된다. 새로운 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연구를 안 할 수가 없다. 지루하다는 것을 못 느꼈다. 날씨가 좀 나쁜 것이 가끔 문제였다. 이번 여름에는 더위를 먹어 2개월을 고생했다. 기온이 33도를 넘어가는데 백사장에 무대를 지었으니 얼마나 더웠겠나. 그래도 아파서 못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또 하나, 출연자湧?고장의 특산품을 가지고 나온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먹는 건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난 음식을 가릴 수가 없다. 특히 뜨거운 여름철 바닷가에 갔을 때 생선회를 입에다 넣어주면 금방 탈이 날 것 같다. 하지만 뱉을 수가 없다. 쫄깃쫄깃하다고 말은 하지만 죽을 지경이다. 다행이 탈이 난 적은 없다. 내 인생도 건강하게 해줬다. 배우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다. 이거야말로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세계적으로도 31년이나 가는 프로그램은 없다."
_ 그 프로를 맡을 때가 58세였다. 지금 그 나이면 통상 은퇴할 시기다.
"나만 보면 박수 치고 좋아하는 것이 내가 자기들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세월이 다 갔다고 하나, 저 사람 봐라, 잘 한다. 저 사람 보면 나도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한다. 그걸 보면 더 이상 기쁠 수가 없다. 은퇴라고 하는 것, 이만하면 다 왔구나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말고, 뭐든지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에 치중하면 그런 생각 다 없어진다. 노래도 단명하고 연기자도 단명한다고 하지만 장수하는 비결을 자기가 발굴하면 된다. 살아남아야 한다. 지난해 30주년 기념할 때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때 '이게 곧 당신들 일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다들 좋아했다."
_ 언어 구사가 정확하다.
"치아가 오복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나도 완벽하지는 않다. 군데군데 치석이 낀다. 이는 자주 봐야 한다. 치료를 자주 해야 한다. 서울 광화문에 이병태 박사라고 치과의사가 있다. 그 분이 내 프로에도 많이 나왔다. 책 쓰기를 좋아한다. 누굴 만나면 늘 물어 보려고 한다. 그래서 친하다. 그 분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왔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은 치과에 간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눈 안에 들락거리는 존재인 우리는 첫째로 중요한 것이 언어다. 말이 불편해지면 정신적으로 위축된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쓴다."
_ 어린 시절은 어땠나.
"우리 계통에 나온 사람들에게 '사나운 강아지 콧잔등 성할 때가 없다'고 말하지만 실은 희극하는 사람들은 통상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이 공통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이 즐겁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지 어릴 적에 내가 아주 개구쟁이였다. 많이 떠들고 다녔다. 동네에서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다녔다. 그때 아마도 끼가 있었던 것 같다. 북한에 있을 때는 음악전문학교에 갔다. 그런 것이 동기가 된 것 같다."
_ 힘들 때는 없나.
"추석을 앞두고 있지만, 명절이 지나갈 때 고통스럽다. 북한에 계시던 부모님들의 생사를 몰라 차례를 못 지냈다.(이 말을 할 때 그의 안경 너머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10여년 전부터는 불효자를 용서해달라는 의미로 차례를 지낸다. 아직도 생사 확인은 안됐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시지 않겠나."
● 송해는 누구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 2년제 전문학교인 해주예술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1951년 1ㆍ4후퇴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 군 복무를 마친 뒤 1955년 창공악극단 가수로 데뷔했다. 가수, 코미디언, 연기자, 영화배우, MC, 개그맨 등으로 활동했다. 58세 때인 1984년 KBS1 TV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아 28년째 이어오고 있다.
선임기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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