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지인이 많은 친구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개인 이메일을 나도 알아두면 좋을 것이라는 배려로 그대로 내 메일로 전달해왔다. 그 첫머리를 읽자마자 뭔가 아득한 것으로의 접속이 이루어지는 듯 잠시 진공에 띄워졌다. '잔서(殘暑)에 문안 여쭙니다' 또는 '잔서에 안부 올립니다'. 번역하면 이런 말쯤이 되는데, 일본사람들이 편지 첫머리에 쓰는 이즈음의 계절 인사말이다. 편지를 여는 첫 인사의 고아한 아취의 여운이 길었다. 이런 아취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오늘날같이 극성스러운 시대에, 극성에 극을 더해 극극성스럽기 짝이 없는 시대에 잠시 놀라운 마음에 부러운 마음까지 스쳤다. 그 인사말이 계절에 따른 의례의 관용적 문구라 하더라도 일상 속에 정착돼 숨쉬고 있다는 것에 절로 주목이 갔다. 그 어느 옛날 처음으로 이런 문장을 만든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무엇인가가 지펴지기까지 하는 듯했다. 아는 일본인도 없거니와 교류할 일도 없었던 나였기에 편지글의 그런 인사말을 맛본 적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어서 특별히 감흥이 더했는지는 모르겠다.
요새가 어떤 시대라고 '잔서에 문안 여쭙니다'와 같은 고릿적 인사말이 끼어들 수 있는가. 인터넷시대의 사회환경, 생활환경, 언어환경의 급속한 변화도 변화지만, 기후 변화, 자연변화가 위협적으로 닥치고 있는 시대다. 자연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기대면서 살아야 했던 예전엔 자연의 폭력과 더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미묘한 계절 변화와 확연한 계절 변화에 절로 주의가 기울어지고 그것에 반응하는 자신들이 절로 살펴졌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 변화에 경외와 복종은 유전되어 대순응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인간 생명의 소멸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습득되었고, 자연은 나의 소멸 이후에도 무궁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틈에서 유한한 인간은 민감해지고 자연이 주는 계절 변화의 기미를 시시콜콜 잡으며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위로를 삼고자 했을 것이다. 계절 인사라는 문화는 소멸의 무상에 처한 인간이 시간시간을 예민하게 느끼며 바로 그 자리에 선 인간의 심리를 자연을 빌어 기록해보는 좀 슬픈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 속에서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라는 맘 같은 것이 흘러가는데 거기에 애써 작은 징검돌 같은 걸 놓아보는 마음. 이런 마음이 계절 문안 인사말을 아취 있게 만들고, 여전히 깊은 마음 속 슬픔을 달랠 수 없는 인간들은 이 인사말을 꺼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잔서에 문안 여쭙니다' 라는 첫 인사말은 굳고 마른 의례적 인사말이 아니라 무의식의 슬픈 강을 같이 흐르는 우리들을 함께 연민하는 인사말인 것같이 느껴진다.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말해본다면 죽음이 안온히 그리워지기도 하듯 잔서에 문안 여쭙는다는 말은 쇠락의 안온한 정서를 퍼뜨려준다.
더욱이 올해 여름, 드디어 닥치기 시작한 이상 기후의 기나긴 날의 광포한 폭염과 폭우, 그것들을 견딘 인내의 지친 뒤 끝에 당도한 이 계절 인사말은 정말 절묘했다. 일본도 3월 대지진 쓰나미 원전폭발 등으로 큰 고통과 시련을, 그리고 예년보다 높은 기온의 여름날까지 겹쳐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받고 있기에 새삼 유별하게 다가왔다. 모든 무성하고 최고에 달했던 것은 한여름을 높게 달궜던 태양의 열과 기운이 쇠잔해가듯 쇠잔해지며 지나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르는 이 인사말의 파동이 결국 이런 글까지 쓰게 하였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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