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10~13일)을 일주일 여 앞둔 1일 낮 남대문 시장. 대목이라 하기엔 너무 썰렁했다. 추석 경기를 묻는 기자에게 대부분 상인들은 "보면 모르느냐" "정말 죽을 맛 이다"는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일본 중국 관광객이 몰리는 일반 잡화 쪽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가장 힘든 곳은 과일상가였다. 고물가의 그늘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다. 명절 전 이 맘 때면 갖가지 추석맞이 과일선물세트가 마련됐지만, 올해는 사정이 영 딴판이다. 35년 동안 남대문에서 과일 장사를 해온 이모(58)씨는 "하루 떼어 오는 물건 값 빼고 나면 장사 하지않는 게 오히려 이득"이라며 "저녁 때 남은 과일들 썩히지 못해 남들 그냥 주거나 집에 싸 들고 간다"고 털어놓았다.
사과ㆍ배의 가격이 천정부지 뛰는 탓에 물건을 구해 오기도 어렵고, 구해 온다 해도 손님들이 선뜻 사질 않는다. 여름 내내 비가 끊이질 않았고 저온 현상에 일조량 부족까지 겹친데다 전남 순천ㆍ나주의 배 농장과 전북 장수, 충남 예산의 사과 농장에선 10% 넘는 낙과 피해도 입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3년 전 최고 품질의 햇배 소매가가 1만9,852원(10개 기준)이었으나 올해는 3만5,216원으로 올랐다.
건어물 및 제수용품 가게도 한 숨이 가득하다.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이모(56)씨는 "정부서 제수용품 비용이 20만원 수준이라는데 턱도 없는 소리다. 제사상에 싼 물건 올릴 사람이 어디 있겠나. 웬만한 물건은 40만원 훌쩍 넘다 보니 아예 사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경기침체에 고물가까지 겹쳐 시장 경기가 죽다 보니, 2차 3차로 이어진다. 퀵 배달을 하는 전모(47)씨는 "올해 추석 배달 물량은 예년 평일 물량보다도 적다"며 "하루 사납금, 식대 포함해서 4만원이 나가는데 잘 해야 하루 5만원 번다"고 안타까워했다.
골목 식당들도 3분의 1 이상 손님이 앉은 식당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웃 상인들끼리 날카로운 신경전까지 벌였다. 조모 씨는 "직장인은 물론이거니와 시장 상인들 조차도 밥 값 아낀다며 도시락을 챙겨오거나 군것질 거리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며 "거리로 나와서 호객행위를 벌이느라 상인들끼리 말 싸움도 잦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양말 장사를 하는 박모(75)씨는 "지난해 청와대 사람이 와서 대통령, 영부인 이름이 새겨진 열쇠고리를 주면서 경기 살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이게 뭔가"라며 불만스러워했다.
꼭 재래시장만 이런 것은 아니다. 백화점, 대형마트 등도 속앓이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대비 매출 증가율이 3월(14.8%), 4월(15.8%), 5월(11.5%) 등 두 자릿수를 기록하다가 6월부터 한 자릿수로 떨어지더니 8월은 지난해 대비 6% 안팎의 성장률 이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물가 때문에 선물패턴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값비싼 과일선물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추석을 앞둔 중소기업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직원들에게 명절 보너스라도 줘야 할 텐데 월급 주기도 빠듯하다는 게 중소기업 사장들의 하소연이다.
서울 영등포에서 15년째 의류 제조사업을 하고 있는 김모 사장은 ▦원재료 가격상승 ▦대출중단으로 인한 자금난 ▦매출 부진의 3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원자재가격 상승은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의류업체에게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담보 없이는 대출도 받기 힘든 영세업체 신세지만 견실한 사업 실적을 인정받아 그래도 조금은 은행권 대출을 받았는데, 이젠 슬금슬금 오르는 금리에 이자 갚기도 버겁다. 엎친 데 덮친 꼴로 해외경기가 나빠져 매출자체가 줄어드는 양상이다. 그는 "일할 수록 적자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수익성이 나빠졌다"며 "우선 올해 예상 매출을 5~10% 정도 낮춰 잡고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8월 19일부터 닷새 동안 중소기업 652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올해 추석에 자금 사정이 '곤란'하다고 응답한 중소기업은 44%였다. 추석 상여금을 지급할 예정업체는 64%로 지난해보다 3.7%포인트 감소했다.
대기업들이 추석을 앞두고 협력업체에 납품대금을 조기 집행한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그건 그야 말로 삼성이나 현대차 같은 초대형 기업 거래업체들에 해당하는 얘기다. 중소 IT업체를 운영 중인 정모씨는 "벌써부터 시중에 자금이 돌지 않으면서 납품대금 연체가 늘고 있다"며 "내년에는 경기가 더 어려울 것으로 보고 대기업들이 예산 편성을 더 줄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은행 뿐이지만, 요즘은 은행 문턱도 높아졌다. 금형제조 중소기업의 한 자금담당 임원은 "가계대출만 막힌 게 아니다. 이자 한 번 빠뜨리지 않고 내고 신용 등급도 양호한데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까지 주저하고 있다. 주변 회사들끼리 급하면 사채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답답한 얘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서울지역 본부 관계자는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예산 중 80%를 이미 상반기에 집행했고 지원 하기로 약속한 금액까지 하면 93%"라며 "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예산을 서둘러 집행하라 하면서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나간 터라 지금은 자금여유도 없다"고 밝혔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채희선기자 hsch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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