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든 얼굴, 처음이 아니다. 욕이 앞뒤로 붙은 대사도 낯설지 않다. 우수 어린 눈빛도 예전 그대로다. 그런데 다르다. 누군가 그를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잔뜩 부은 얼굴로 스크린 속에서 주춤거린다. 통쾌한 주먹 한방과 호쾌한 발차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세수하고 상처만 없으면 제비를 해도 밥은 먹고 살'(영화 '통증' 속 주동현의 대사) 준수한 이미지도 찾기 힘들다.
'통증'의 박남순은 권상우의 연기 인생 중 가장 초라하다 할, 남루한 비주얼을 지닌 역할이다. 그런데도 권상우는 "스스로 봤을 때 가장 멋있게 나온 영화"라고 만족스러워했다. "내 많은 것을 버리고 찍은 영화이니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고도 말했다.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있는 그를 29일 오후 서울 자양동 한 극장에서 만났다.
남순은 어릴 적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통증을 못 느낀다. 내일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그는 불운한 '재능'을 이용해 자해공갈을 하며 채권 추심을 한다. 남순이 돈을 받아내다 마주친 주동현(정려원)도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겨준 것은 감당하기 힘든 빚과 혈우병.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으며 조그만 상처조차 두려워하는 동현, 정에 굶주린 무뚝뚝한 남자 남순, 두 바닥 인생의 사랑은 필연처럼 이어진다. 투박하지만 애잔한 사연이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통증을 못 느끼는 자해공갈단원 역할이니 권상우는 "30분 정도 주먹과 발로 맞는 장면을 찍고선 얼굴이 퉁퉁 부어 촬영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짓눌린 머리 모양이 좋겠다는 감독님 말에 머리를 안 감고 촬영현장으로 직행"하기도 부지기수. 자동차 열쇠를 꿀꺽 삼키거나, 상처치료연고제를 통째로 짜 로션처럼 얼굴에 바르는 장면에서 그의 많은 팬들은 좀 뜨악해 할 듯. 그래도 그에게 감정 연기가 힘들었던 듯하다. 권상우는 "정서적으로 성장이 멈춘 사내이니 얼굴에 반응을 크게 나타내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전하는 게 큰 숙제였다"고 밝혔다.
'통증'의 지휘자는 '친구'(2001)의 곽경택 감독이다. 남성미를 앞세운 스타 배우와 남자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스타 감독이 섬세해야만 하는, 가슴을 에는 사랑의 정서를 빚어낸 것이다. 권상우는 "가장 함께 해보고 싶었던 감독과 의외의 작품을 해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영화 속엔 동현이 남순의 어눌한 말투를 놀리는 "혀도 짧은 게"라는 대사가 나온다. 남순이 혀를 길게 뽑고 "나 혀 길어"라고 반박하는 모습도 담겨있다. 대사 전달이 잘 안 된다는 권상우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반영된 장면들. "곽 감독님이 현장에서 즉석 제안했는데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그는 "기자시사회에서 웃음이 터진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고, "내가 혀 콤플렉스나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렇게 찍었겠냐"고 반문도 했다.
권상우는 인터뷰 다음날 저녁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청룽(成龍)이 주연 연출하는 '12 차이니스 조디악 헤즈'의 촬영 재개를 위해서다. 지난 여름 이미 프랑스 파리 촬영에 참여했던 권상우는 "한번 태어난 인생,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다"며 해외 진출 의욕을 드러냈다. "할리우드 영화 출연도 추진 중이다. 동양인 보드가드 역할의 액션물"이라고도 말했다.
"일단 영어가 잘 안 되니 외국시장은 액션으로 어필해야죠. 연기 잘한다는 말보다 코미디든 멜로든 액션이든 다 잘 어울린다는 평가가 더 좋아요. 그런 욕심이 없으면 이렇게 부지런하지 못할 것 같아요. (배우 손태영과) 결혼 뒤 책임감도 커지고 큰 배우가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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