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의 해외 탈세를 막기 위해 국세청이 올해 야심 차게 도입한 '해외금융계좌 자진신고제' 성적표가 초라하다. 첫 술부터 배부를 순 없다지만, 애당초 제도 자체의 한계가 분명했다는 지적이다.
개인 신고 200명 불과
31일 국세청이 발표한 '해외금융계좌 신고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계좌 잔액이 단 하루라도 10억원 이상이었다고 신고한 건수는 총 525건, 금액으론 11조4,819억원에 달했다. 이중 법인(기업)을 제외하고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한 개인은 211명(신고액 9,756억원)에 불과했다.
신고자 대부분은 재벌 총수 일가, 연예인 및 운동선수, 변호사를 비롯한 고소득 전문직종인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세무서별 개인 신고현황을 보면 재벌 총수와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용산구(23건, 1,773억원)가 1위에 올랐고, 강남세무서(21건) 삼성세무서(19건) 성남세무서(19건) 반포세무서(17건)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초 국세청이 해외금융계좌 신고 접수를 받기 전 10억원 이상 해외계좌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해 신고 안내문을 발송한 2,000명의 10.1%에 불과한 수준. 그나마 신고자 대부분은 재산반출 과정이 투명하게 정상적으로 이뤄졌고 해외원천소득도 꼬박꼬박 신고해 온 성실 납세자들이었다. 결국 당초 의도했던 재산반출 과정이 불투명하거나 탈루가 의심되는 이른바 '검은 계좌'는 이번에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결과는 일찌감치 예견됐다.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하지 않는 경우 미신고액의 5%(내년부터 10%)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그 동안 숨겨온 해외재산의 자진 신고를 유도할 정도의 제재로서는 매우 미흡하기 때문이다.
박윤준 국세청 국제조세관리관은 "신고해야 될 개인 납세자가 실제 몇 명인지 추정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이번 신고 결과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면서도"숨겨진 해외소득이 드러난 게 없는 만큼 이번 계좌 신고를 통해 세원을 양성화하는 효과는 미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세무조사ㆍ형사처벌 등 보완책 마련
국세청은 해외계좌 미신고 혐의자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함으로써 향후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간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이번에 신고를 하지 않은 개인들 중 탈루 혐의가 두드러진 38명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주물 금형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소득이 많이 발생하는 해외공장 지분을 이전해 소득을 탈세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자영업을 하는 B씨는 일본에 타인 명의 도소매법인을 세운 뒤 여기서 발생한 소득을 일본 은행계좌에 숨겨오다 국세청 감시망에 적발됐다. 박 관리관은 "이번 세무조사 대상에 포함된 이들은 기본적으로 해외계좌가 10억원 이상인 점이 확인된 만큼 탈루 사실이 적발되지 않더라도 미신고에 따른 과태료는 부과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 보완도 추진한다. 국세청은 자진 신고자에 대해 가산세 일부를 완화해 세금 부담을 덜어주고, 일정액 이상 미신고 계좌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기획재정부에 건의해 놓은 상태다. 당근과 채찍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미신고 계좌는 언젠가는 적발된다는 인식을 꾸준히 확산시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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