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은 호사를 누리다 한순간 도망자로 전락한 무아마르 카다피의 가족들에게 생각하지 않던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다. 알제리가 29일(현지시간) 부인과 세 자녀의 도피를 받아들인 것.
사실 카다피 몰락 이후 카다피 자신이나 가족을 비호하는 것은 새로 리비아의 권력을 잡은 시민군이나 반카다피 공습을 실시한 서방 국가를 적으로 돌리는 일로 간주돼 왔다. 그렇다면 알제리는 왜 새로 출범하는 리비아 정부와의 관계 악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은 카다피 가족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걸까.
알제리 외무부는 "인도주의적 이유"라 둘러댔지만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31일 알제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분석했다. 바로 19~20세기 100여년간 알제리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디펜던트는 "프랑스가 리비아 폭격을 주도한 순간부터 카다피의 저항은 알제리인들에게 과거 자신들의 독립투쟁을 재현하는 것으로 비쳤다"고 보도했다. 1954년부터 62년까지 대(對)프랑스 독립전쟁에서 알제리인 100만명이 숨졌던 것을 떠올리며, 프랑스에 저항하다 권좌에서 내쫓긴 가다피의 가족에게 '형제애'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이 아닌 정권 차원의 이유도 있다. 인디펜던트는 42년간 철권을 휘둘렀던 카다피처럼, 알제리 권위주의 정부 역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권력을 지켜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결국 알제리는 '제2의 리비아'가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에, 서방 주도로 이뤄진 카다피 축출 작전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알제리는 서방이 석유 때문에 리비아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한 것으로 간주하며, 가스 매장량 8위인 알제리 역시 서방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BBC는 보다 현실적으로 알제리 정부와 리비아 시민군 대표기구인 과도국가위원회(NTC)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NTC는 그간 알제리가 카다피를 돕기 위해 용병을 파견했다고 주장해 왔고, 이를 부인한 알제리 정부와 마찰을 빚어 왔다. 알제리가 북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NTC를 리비아 대표기구로 인정하지 않은 점 역시 둘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BBC는 분석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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