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전 시울시장과 곽노현 현 서울시교육감을 둘러싼 사태는 참으로 희한하다. 오씨의 경우 주민투표의 과정과 결과를 훑어보면 그가 보수의 아이콘이 분명한 듯하다. 지난번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한 것보다 많은 25%가 투표에 참여했다든지, 여론조사로 추정해본 결과 투표자의 85%가 단계적 급식에 동의했다는 것을 거론하며 보수층의 결집이 있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곽씨의 경우 교육감 당선 이후의 정책으로 보거나 선거 당시 후보단일화 과정을 돌아보면 그를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면 '보수는 부패 때문에, 진보는 무능 때문에 망한다'는 기존의 인식이 뒤집어지고 있으니 희한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무의미해진 보수ㆍ진보의 잣대
건곤일척을 벌였던 오씨와 곽씨가 망조(亡兆)에 들어간 시기가 기막히게 절묘한 점도 희한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얘기는 일단 접어놓겠다. 주민투표 과정과 결과에서 오씨는 정치적 무능함을 드러냈다. 시의회와의 알력을 정치력으로 풀지 못하고 주민투표로 끌고 간 대목이 가장 큰 무능이다. 의회의 75% 정도를 야권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라지만 100% 적군(?)인 반대 정파와 협상하여 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고 정치인의 능력이다. 더구나 그는 100% 아군인 한나라당과도 협상ㆍ타협에 실패한 채 주민투표에 들어갔다. 이후 스스로 대권을 포기한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시장직을 걸겠다고 또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은 유능한 보수 정치인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200만 명에 가까운 서울시민이 '보수층 결집'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한 정도였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고 양측 주장에 혼돈이 있는 상황에서 곽씨를 '부패한 진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스스로 고백한 내용만 하더라도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도덕적이고 원칙적인 교육감'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그는 "어려운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서 선의의 지원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처지와 선의의 지원, 그리고 2억 원이라는 현금은 부패하지 않은 일반인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인정과 도리를 강조한 대목을 보면 그는 '무정하고 탐욕스러운 행위' 정도가 돼야 부패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공인(公人)의 부패는 그것만이 아니다. 더구나 진보ㆍ개혁적 공인에게 기대하는 부패지수는 훨씬 엄격하지 않은가. 그는 회견 내용만으로 이미 '부패한 진보'라 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소 (부패지수에) 흠이 있더라도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인물끼리 모였다고 생각하던 여당이나 언제나 도덕성을 앞세우던 야당들이 서둘러 오씨 곽씨와 선을 긋고 있는 모습은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나라당은 대표의 말만 들어봐도 오씨와 선을 긋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출당에 버금가는 조치를 취해버렸다. 진보진영이 자신들의 대표선수에게 수사중인 사안을 걸어 사퇴를 종용하는 발언을 쏟는 경우는 예전엔 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여야 정당은 너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미 국민은 '한나라당=보수, 민주당=진보'라고 여기고 있지 않다. 경제 관점에서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논쟁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됐고, 복지와 무상급식 정책에서조차 국민은 보수와 진보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있는데 유독 자신들끼리 스스로 낙인을 찍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만 이념 편가르기 계속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계기로 불거진 '오씨 곽씨 사태'는 보수ㆍ진보의 이념적 문제가 이미 국민의 관심사가 아님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유능한 보수, 도덕적 진보가 통용되던 시기는 끝났다. 어떤 지도자가, 어떤 정책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더 많이 갖다 줄 것인지 그것만이 최대의 관심사일 뿐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은 물론이거니와 오는 10월 26일 서울시장(교육감도?) 보궐선거도 다르지 않을 터이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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