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을 고(高), 기름 고(膏)." 거지 행색의 이몽룡에게 사또가 거드름을 피우며 운자를 던진다. 연출가 장수동씨는 말끝을 살짝 들어올리라고 주문한다. 단박에 연습장 분위기가 추녀 끝마냥 날렵해진다. 29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서울오페라앙상블 단원들은 '춘향전' 막바지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한중 수교 19주년과 제7회 중국 동북아국제박람회 개막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초청된 작품이다. 부채춤 등 풍성한 볼거리가 시선을 붙드는 이 무대는 한의 정서와는 거리를 둔다."우리 사랑, 영원한 사랑…" 옥중에서 큰 칼을 쓰고 시름에 젖어 있는 연인에게 들려주는 이도령의 아리아는 비통하기보다 테너의 가창력으로 객석을 설득한다.
지순한 사랑의 승리라는 통상적 해석에 앞서 무대는 애틋한 사랑에 초점 맞춘다.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이몽룡을 알아볼 기력조차 없는 춘향이 죽을 힘으로 노래한다. "어서 죽여주오." 다가가 포옹하며 토하는 몽룡의 세 글자는 '춘향전'을 마침내 완벽한 사랑 이야기로 승화시킨다. "춘향아!" 저 한 마디를 위해 이 1시간 40분의 오페라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무대는 외국 관객들을 설득하는 셈이다.
지난해 이 오페라단이 동양적 색채로 재해석, 베이징에서 공연한 오페라 '리골레토'의 성공을 잇는 무대이다. 장수동 예술감독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에서는 절멸된 서양 오페라 전통을 되살리고, 한중 수교 20주년을 앞둔다는 의미까지 덧붙여져 중국에서는 정말 준비에 열심이다"고 전했다. "희극성에 초점을 맞춘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과는 달리 한국적 전통에 입각한 음악 드라마라는 데 중점을 둔 장일남의 해석은 중국인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선사할 겁니다." 그는 "춘향전을 악극 형식으로 공연한 북한과 춘향전을 주제로 페스티벌 가능성도 모색 중"이라며 "서울이나 평양, 아니면 중국의 도시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데는 작곡자 장일남이 해주 출신으로 평양음악학교 나왔다는 이력도 한몫 한다.
이번 중국 무대는 중국 내 경제지형도의 변화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다. 장 감독은 "낙후된 동북 지역을 경제특구로 개발하자는 창지투(長吉圖) 경제특구 계획과 맞물려 중국측은 한국적 색채가 강한 작품을 희망해 왔다"며 "4월부터 창춘(長春), 하얼빈(哈爾賓), 선양(瀋陽) 등지에서 열리고 있는 투자박람회와 관련, 중국서는 이 무대를 '창춘국제문화축제'에서 주요 행사로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국의 대도시에서 일고 있는 극장 건설 추세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춘향 역의 소프라노 정꽃님, 이몽룡 역의 테너 이승묵을 비롯해 조역급의 맛깔난 연기도 무대의 재미를 더한다. 월매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혜실은 "연기하느라 노래에 제대로 신경을 못 쓴다"며 "딸을 위해 헌신하는 모성은 공산권에도 큰 울림 전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지린(吉林)성 창춘 국립동방대극장에서 9월 2, 3일 공연된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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